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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호영 Dec 17. 2021

푸른 돔의 도시 사마르칸트 3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서 고구려 사신을 만나다


아프로시압 궁전 벽화에서 만난 고구려 사신   

  

다시 흰색 가벽에 달린 문을 통과해서 아프라시압 박물관 뒤쪽으로 나왔습니다. 건물을 돌아 정면으로 옵니다. 이 박물관은 아르메니아 건축가가 지었답니다. 당시는 우즈베키스탄과 아르메니아 모두 소비에트 연방국가였으니 소련 건축가라고 해야 할까요?  박물관에서 조금 물러나 건물 전체를 바라봅니다. 박물관은 사마르칸트 2500주년을 기념하는 1970년에 완공했다는데, 건물 정면에는 2750이라는 수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습니다. 소그디아나의 역사를 생각하면 2750년이 더 적당해 보입니다만. 그 양옆으로 16명의 인물 부조가 눈길을 끕니다. 


왼쪽부터 보면 첫 번째 사람은 컴퍼스를 들고 있으니 수학자를 나타낸 것 같은데,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알 콰리즈미일까요? 책을 들고 있는 그다음 사람들은 누구를 특정해서 그린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한 명 한 명 오른쪽으로 옮겨가면서 짚어보는데, 여덟 번째 사람은 천문대 모형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울르그 베그임에 틀림없습니다. 중앙현관을 지나 세 번째 사람부터는 터번을 쓰고 있지 않습니다. 언뜻 지나쳤더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테지요. 오른쪽에서 세 번째 있는,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을 레닌이라고 말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여러 개 보았습니다. 외모가 레닌을 좀 닮기는 했지만,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바실리 바르톨트랍니다. 레닌과 동시대를 살았던 소련의 역사학자로 몽골제국, 중앙아시아, 중동의 역사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린 학자라고 합니다.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어울리는 인물입니다.     


아프라시압 박물관 정면. 16명의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 6명은 터번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아 구 소련의 인물로 보인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니 벽화를 떼어와 다시 재현한 전시실이 바로 보입니다. 다른 전시물로는 눈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면 오아시스 연합국가 소그디아나의 7세기 모습을 그린 벽화, 특히 고구려 사신이 그려져 있다는 벽화를 볼 수 있으니까요.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전시장 안으로 들어섭니다. 들어가는 입구는 동쪽입니다. 생각보다 크지는 않습니다. 네 벽면에 벽화가 있습니다. 발굴 당시와 비슷한 크기의 방에 벽화를 그대로 갖다 붙였다고 하지요. 11미터씩 네 면이고 동쪽에만 문이 있습니다. 천 삼백여 년이 지난 벽화는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발굴 당시보다 더 흐릿해진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커다란, 그리고 오래된 그림을 보는 감동을 천천히 즐기려고 합니다. 


벽 하나의 크기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비슷할까요? 아프라시압 벽화가 더 길지만 훼손된 부분이 있어서 비슷하다고 보아도 될 듯싶습니다. 당시 이 그림은 식당 벽화로 그려진 것인데, 복원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훼손되어 지금과 같이 복원하는데 20년이 걸렸다고 하지요. 벌써 10년 전의 일입니다.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서 그 그림을 보기 위해 서울을 떠나기 전에 미리 예약했었지요. 도착하니 한 무더기씩 입장객을 나눠 들여보내면서 딱 15분간 볼 수 있게 해줬습니다. 살짝 어둑한 전시실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최후의 만찬에만 빛이 있었지요. 신비한 느낌이 들도록. 그때 비하면 예약도 필요 없고 관람 시간 제한도 없어 마음이 편합니다. 더구나 동서남북 사면에 가득 찬 그림 때문인지 밀라노에서와는 다른 파장의 감동이 가슴 저 밑바닥에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우선 맞은편 서벽으로 갑니다. 아프라시압 벽화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을 끈 건 서벽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 사절단의 모습 때문입니다. 7세기에 중앙아시아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 사절단이라니! 중국 너머 서역, 아라비아, 인도에 이르기까지 교역했었다는 말은 들었지만 우리의 자료가 아니라 낯선 곳에서 그 증거를 본다는 건 또 다른 설레임이니까요. 


남벽 벽화(왼쪽). 서벽의 오른쪽 끝에 고구려 사신 두 명이 있다(오른쪽).


서벽의 벽화는 사절단의 접견 장면입니다. 위쪽은 발굴 이전부터 훼손되었는데 아래쪽에는 여러 외국의 사절과 무사들이 있습니다. 벽화 왼쪽 상체가 훼손된 사신의 흰색 옷 아랫단에 기록된 문장에 의하면, 차가니아의 사신이 바르후만왕을 알현하고 있고 다음 순서가 차치의 사신이랍니다(차가니아는 사마르칸트 부근의 작은 나라이고, 차치는 타슈켄트 지역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왼쪽 아래쪽에 예물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차가니아 사절단과 차치의 사절단이겠지요. 이 문장에 근거하여 위쪽에 칼을 차고 앉아 있는 사람들은 바르후만왕의 신료들과 긴밀한 관계였던 튀르크인들 사절단을 맞이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지요. 벽화가 그려지던 때에는 소그드인들은 튀르크왕조의 보호를 받으면서 무역을 했습니다. 정치는 튀르크인, 경제는 소그드인이 주도권을 갖고 있던 시기가 백여년 넘게 이어지던 시기였지요. 튀르크왕조가 당나라에게 정복당하면서 소그드인들은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되지만요.      


당시 정세에 대한 견해에 따라 여러 가지 복원도가 있는데, 중앙 위쪽에 바르후만왕이 앉아 있다고 상상한 복원도를 그린 학자는 이 문장을 중요한 근거로 삼았겠지요. 중앙 아래쪽에 비단으로 보이는 천을 여러 필 들고 있는 사람들은 중국의 사절단이라고 보고요 오른쪽 아래에 여덟 명의 사신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끝 쪽에 새 깃털을 꽂아 만든 조우관이라고 부르는 모자를 쓰고 긴 고리 손잡이가 달린 칼인 환두대도를 허리에 찬 두 명이 고구려 사신입니다. 소그드인들에게 고구려가 동쪽 끝에 있는 나라이듯 그곳에서 온 사신을 그림에서 오른쪽 끝에 그렸나 봅니다. 


서벽 벽화와 서벽 복원도


한편, 오른쪽에 놓인 북과 깃대는 유목민족을 상징합니다. 소그디아나 지역에 종주권을 행사하던 서돌궐카칸국이 657년 당나라 연합군에 패했으니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돌궐의 영향력이 살아있을 때였나봅니다. 화면에 꽤 많이 보이는 머리를 땋은 변발인들은 돌궐인들이지요. 

실물로 벽화를 보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만은 아닙니다. 황토색 벽면으로 재현된 군데군데 소실된 부분은 깊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서벽을 삼등분해봅시다. 복원도에 의하면 왼쪽에 서 있는 사절단은 열두 명인데, 벽화에서는 다섯 명만 온전히 보이고 한 명은 팔다리와 옷자락 아랫단만 보입니다. 그런 식으로 소실된 부분, 흐릿한 부분, 상대적으로 선명한 부분이 섞여 있습니다.


남벽에는 사당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고 이곳으로 가는 행렬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행렬 맨 앞에는 코끼리를 탄 사람이 있고 이어서 낙타를 탄 사람도 있습니다. 거위 네 마리 뒤쪽으로는 화려하게 치장된 말을 타고 있는 사람도 보입니다. 조상묘에 참배 가는 행렬이거나 결혼 행렬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북벽에는 당나라 복식의 여인들이 뱃놀이하는 장면과 말을 탄 남자들의 역동적인 수렵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남벽 벽화와 남벽 복원도


이 벽화를 그린 정확한 연도와 무엇을 그린 것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그림이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는 시기도 658년 이후로 보기도 하지만 이르면 640년대에서 늦으면 675년까지 다양합니다. 그 시기에는 당나라가 돌궐을 누르고 강국이라고 부르던 사마르칸트의 바르후만왕을 강거도독에 임명하고 당나라와 몽골이 전투를 벌이는 등 이곳을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 서벽에는 돌궐의 영향력이 보이고 북벽에는 당나라를 주제로 한 그림이 동시에 그려진 이유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참고하면 어떨까요.    

 

何國, 또는 큐샤니야라고도 한다. 그 성 좌측에는 이층집이 있는데, (그 집 속의 벽) 북쪽에는 중국의 옛 황제를 그렸고, 동쪽에는 동궐과 인도의 파라문, 서쪽에는 페르시아, 비잔틴의 여러 왕들을 그렸다.   

  

쿠샤니아는 아프라시압 북서쪽에 있는 도시국가로 소그디아나에 포함되는 나라이지요. 이곳에도 아프라시압 궁전과 비슷하게 사방에 벽화가 그려진 궁전이 있었나봅니다. 중국, 인도, 돌궐, 서역의 통치자들이 함께 그려진 건물이 당시 유행이었을까요? 아무튼 당시 소그드인들의 세계관에 동쪽을 대표하는 나라로 고구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겠지요.      


전시관 한쪽에서는 3D 그래픽으로 복원된 아프로시압 궁전과 벽화를 영상으로 보여줍니다. 뒤쪽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서울에 돌아가서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지만, 여기서 보는 맛은 또 다를테니까요. 그런데 화면에 재미있는 장면이 뜹니다. 재현한 접견실의 천장이 히바의 주마모스크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모양인 모고임천장입니다. 비가 별로 오지 않는 지역이라 모고임천장을 하면서 채광을 위해 가운데는 비워놨나 봅니다.              

발굴된 건축물의 장식물 일부. 조로아스터교에서 많이 쓰이던 연주무늬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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