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이 시작하자마자부터 내년도 다이어리를 사고 싶어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터무니없이 비싸거나 너무 못생겨서 1년 동안 간직하고 싶을 것 같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애초에 다이어리 상품 자체가 다양하지가 않으니 선택을 위한 고민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하고 얼마 전 아마존에서 저가 다이어리를 주문했다(저가라 해도 우리 돈 만원이 넘는다). 근데 막상 1년을 나와 함께할 다이어리인데 아무거나 쓴다는 것이 못내 아쉬워 발품을 팔아보기로 했다. 유난스럽겠지만 몇 해 전부터 나에게 다이어리는 1년을 함께할 매우 중요한 동반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아무나 동반자로 들이고 싶지가 않았다.
다운타운 상점을 생각나는 대로 찾아다니며 내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가 있는지 둘러봤지만 역시나 없었다. 아니 대체 왜 없는 것일까? 광화문 교보문고에 쫙 깔린 눈 돌아가게 많은 다이어리 컬렉션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미국사람은 다이어리라는 것을 모르나 싶을 정도로 없었다.
‘미국 사람들아! 다이어리 필요 없는 거니??’
헛걸음치고 돌아오는 전철에 앉아서 창밖 풍경을 보고 있을 때였다. 두어 칸 앞 맞은편에 양 눈썹과 코에 피어싱을 하고 젓가락으로 긴 머리를 올려 단단하게 고정시킨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 무언가에 한참을 집중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펜으로 아이패드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에게 깨달음이 왔다.
애플의 나라에서 손으로 쓰는 추억의 다이어리를 찾고 있다니 내가 실로 잘못된 다리를 두드리고 있었구나 싶었다. 이미 제조업이 거의 사라진 나라에서 아날로그 상품을 찾고 있으니 마치 공중전화 쓰겠다고 동전 찾는 꼴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패드를 사서 다이어리 어플을 깔아야 마땅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아직도 손으로 쓰고 페이지를 만지며 넘기는 게 좋은 옛날 사람인데 어쩌지?????'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보던 중 광고가 떴다. 포트넘 다이어리 광고였다. 너무너무 예쁜 티파니 민트색에 고급지게 음각으로 공작을 그려 황금색 왕관을 씌운 2024년 다이어리! 2024년 그 자체였다. 구매하기를 눌러 들어갔더니 무려 80파운드, 100.83달러였다. 물론 영국에서 배송 보내줄 테니 배송비 내라는 설명도 친절하게 덧붙여져 있었다.
포트넘 다이어리를 사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어 놀라우면서도 그 돈이면 차라리 아이패드를 사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다이어리 집착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디지털 인간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적어도 다이어리만큼은 온전한 내 것으로 내 눈앞에 놓고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큰 20세기 유물임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