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3초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 universal seoulite Jan 19. 2024

You Made My Day

며칠째 집안에 콕 박혀 있었다. 추워도 너무 추웠고 눈이 쌓인 길 위에 비가 오면서 곳곳이 빙판길이라 가급적 외부활동을 자제하라는 안내도 있었던 터라 망설임도 없이 집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이 예약한 책 수령 마지막 날이라 별 수 없이 옷을 단단히 껴입고 집을 나선 길이었다. 그냥 깔끔하게 책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지만 계속 미련이 남아 나갈까 말까를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을 견딜 수 없어 길을 나섰다.     


버스 앞에서 만난 한 남성이 내게 길을 내어주며 자신은 젠틀맨이니 먼저 타라고 양보해 줬다. 꿍얼거리며 잔뜩 움츠린 자세로 추위를 견디는 중에 낯선 사람의 작은 친절도 고마웠다. 혹한기에 운영하는 쉼터의 위치를 사람들에게 묻는 것을 보니 남성은 홈리스(Homeless) 같았다. 요 며칠 혹한의 날씨에 갈 곳 없는 홈리스들을 위해서 시에서 관리 중인 공공시설을 개방하고 있었는데 남성은 마침 내가 향하는 도서관을 찾고 있는 듯했다.      


정류장에서 먼저 내린 남성은 빙판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는 말을 하며 내가 무사히 내릴 때까지 지켜봐 줬다. 그리고 ‘Stay Warm and Happy New Year’이라는 새해인사를 남기고 도서관을 향해 떠났다. 무언가 이상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는 분명 쉼터를 찾아 떠나는 홈리스였다. 근데 얼굴에 구김 하나 없는 밝은 미소를 띠며 친절하게 내가 안전히 내릴 때까지 기다려주고 행복한 새해를 기원해 줬다.      


그동안 보아온 다른 홈리스들과는 분명 달랐다. 반쯤 술이든 약에 취해 초점을 잃은 눈을 하고 있거나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하고 있거나 삶에 대한 의욕 하나 없이 무표정을 하고 있는 그런 홈리스가 아니었다. 얼굴에는 활기가 가득했고 눈빛은 다른 누구보다 총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혹한을 피해 쉼터를 찾아가는 갈 곳 없는 홈리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상하면서도 어려움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잃지 않은 그 모습을 오늘 길에서 마주친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이 났다. 내가 본 것은 비록 추위를 피해 쉴 아늑한 자신만의 공간은 없지만 꿈과 확신이 넘치는 얼굴이었던 것 같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에게서 삶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그 눈빛을 봤던 것 같다. 그리고 더 설명이 되지 않게도 그 순간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양치기 산티아고 앞에 나타난 살렘의 왕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도서관은 혹한으로 임시 휴무라며 문이 잠겨있었고 나는 내가 두 달이나 기다렸던 오프라 윈프리의 신간 ‘Build the Life You Want’를 빌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행복해지는 법에 대한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나는 오늘 행복해지는 방법을 조금은 더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은근하고 훈훈하게 그리고 넉넉하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