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생이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by a universal seoulite

지난여름, 15년 차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삶은 공식적으로 사망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지난여름 말 잘 듣고 성실해서 함부로 대해도 문제 될 것 없던 만만한 미생의 삶을 깊은 바닷속 심연으로 던져버렸다. 지난 15년간 미련하게 붙들고 살고 있었던 월급쟁이 삶의 안온함과 남들이 정한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 삶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깨닫고 난 직후였다.


누군가는 코로나로 인해 인류의 삶이 BC(Before Covid19)와 AC(After Covid19)로 나뉘게 되었다고 했는데, 아마도 내 인생은 2021년 여름 전과 후로 나뉘게 될 것이다.


지난여름, 나는 어쩌다 보니 원한 것도 아니었는데 커리어의 정점에 있었다. 모두가 거절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내게 온 자리에서 마치 지휘봉을 받아 든 어린 꼬마처럼 늘 불안했고 서툴렀다. 일터는 매일 예측불허에다 일촉즉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발생하는 크고 작은 어려움쯤은 언젠가는 마주칠 통과 의례처럼 생각하며 주눅 들지 말자고 스스로를 위로했곤 했다.


어떤 날은 미처 영글지도 못하고 웃자라 성장통을 앓고 있는 기분이었고, 또 어떤 날은 온실 속 이름 모를 작은 화초가 되고 싶었던 황무지 바오밥 나무처럼 속절없이 덩치만 큰 느낌이었고, 가끔은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 현실을 외면하는 타조가 되고픈 마음이었다.


아침이면 불안한 마음을 누르기 위해 매일 출근길마다 '나는 할 수 있다!'라고 주문을 걸듯 외쳤다. 직장생활 내내 다양한 방법으로 어려운 상황들이 있었지만 성실하게 잘 극복해온 과거 경험에 비추어 이번에도 잘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일이 어려워봤자 일일뿐 못할 건 없다는 자신감이자 오만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때때로 내가 강력하게 믿는 것들도 의심을 해봐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듯 기습적으로 치고 들어온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고 처음 마주하는 상황에 나는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다들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들을 마침내 보란 듯이 성공적으로 해낸 그때 기쁨에 환호할 틈도 없이 불행은 찾아왔다. 그리고 열심히 나를 굴려먹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비겁하고 비열하게 돌변하던지 바닥 끝까지 드러난 그들의 민낯을 지켜보았다. 나는 철저하게 이용당한 것이었다.


그날 나의 15년 회사생활은 공식적으로 사망했다.


처음에는 왜 나한테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는지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웠고, 상사라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배신감에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한 시간들을 지나고 나니 어느 날 문득 내가 이렇게 당한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힘이 있었다면 이렇게 무방비로 당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돈이든 배경이든 회사에서 독보적 우위를 누릴 수 있는 희소가치가 있는 그 무엇이라도 내가 갖고 있었더라면 나는 나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자산가였다면(물론 그렇다면 애당초 회사를 다니지 않았겠지만 내가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참지 않을 심리적 지지선이 되었을 것이다) 혹은 나 없이는 회사가 굴러가지 않는 능력이 있었다면(아마도 많은 직장인은 대체제가 있는 부품일 뿐 퍼즐의 마지막 한 조각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나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더 큰 좌절감이 들었다. 최소한 내 팔목에 번쩍거리는 롤렉스 한 줄 정도는 상징적으로 차고 있었어야 했다.


어느 날 무심코 보고 있던 영상에서 한 문장이 내 귀에 내리 꽂혔다.


"Life always whispers to you first. If you ignore the whisper, sooner or later, you'll get a scream." (인생은 항상 당신에게 먼저 속삭인다. 만약 당신이 그 속삭임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멀지 않아 인생은 당신에게 소리를 지를 것이다.)


영상 속 오프라 윈프리는 마치 지난여름 내게 일어난 일들을 지켜본 사람처럼 소름 끼치게 정곡을 찌르며 말했다. 그때야 비로소 인생이 내게 정신 좀 차리라고 크게 혼쭐 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마이크 타이슨이 말했던가.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한 대 제대로 맞기 전까지.' 그렇다. 예상대로였으면 나는 모든 일들을 순조롭게 끝내고 아무 생각 없이 베짱이처럼 여름휴가를 길고 한가롭게 즐길 계획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면 나는 아마 다음에 올 것들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면서 또다시 이끌려가는 인생을 지금도 살고 있을 것이다. 마치 서커스 천막 아래가 제일 안전하다는 듯 밥이 나오면 밥을 먹고 쳇바퀴를 돌리라고 하면 쳇바퀴를 돌리는 서커스 극장 동물처럼 바깥세상을 내다볼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내 방식대로 살기로 했다. 회사가 주는 안락함에 취해서 살지 않기로 했다. 그제야 직장인의 임금인상률보다 물가 상승과 세금 인상률이 몇 곱절 더 크다는 신문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월급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해서 결코 평등하지 않다. 나라는 사람의 자존감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언제든 회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계획을 하루라도 빨리 고민해야 한다.



사진출처 : 오스트리아 알베르티나 뮤지엄 인스타그램(@albertina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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