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은 2층 단독주택이었다. 작은 마당에는 이름 모를 다양한 꽃나무들이 있었고 해마다 4월이면 각종 꽃들이 흐드러지게 펴서 그야말로 꽃동산이 따로 없었다. 마당 한편에는 진순이라 부르던 진돗개도 있었는데 어느 여름, 이른 새벽에 나를 깨우는 아빠를 따라 나갔더니 진순이가 낳은 새끼 강아지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신비롭고 청량한 새벽 공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내가 제일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바로 나만의 마당이 없다는 것이다. 아파트에서는 바깥공기라도 잠시 쐬고 싶으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 베란다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바깥바람을 잠시 느낄 수 있겠지만 문을 열고 나가도 여전히 우리 집인 '나만의 마당'을 누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아파트 베란다에 테이블이라도 놓고 싶었지만 확장 공사를 하고 남은 자투리 베란다에는 의자도 간신히 놓을 수 있을 정도이니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외국 영화를 보면 발코니에 테이블을 놓고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정원도 가꾸고 하는데 왜 우리나라 아파트는 저런 아름다운 발코니를 안 만드는 것일까 늘 궁금했었다. 내 궁금증을 알기라도 한 듯 얼마전 유튜브 방송에 출연한 유현준 교수가 우리나라 아파트에 발코니가 없는 이유를 설명해줬다. 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파트 구조는 사람들이 가보지 않고도 집을 살 수 있을 만큼 유사한 형태로 표준화되어 오랜 세월 유지되어 왔고, 실내 공간의 크기를 최대화하려다 보니 궁여지책으로 베란다를 확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현준 교수는 아파트 평면도 결재권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건설사 상무님들이 변해야 우리나라에도 다양한 아파트 구조가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평면도는 아파트 분양의 흥행과 건설사의 이익 극대화에 최적화된 아파트 건설 산업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 오래되고 보증된 대중성을 포기하는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즉, 우리나라 상무님들이 창의적인 평면도로 인해서 발생할 수 있는 분양 실패나 건설사 수익 감소를 책임지면서까지 모험을 강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건설사 상무님도 파리 목숨 직장인이기는 마찬가지이니 설득력 있는 얘기다.
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이 비단 건설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관례를 깨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윗분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라고 하면서 새로운 것을 가져가면 예전에 유사한 사례가 있었는지부터 묻는다. 새로운 시도에 대한 성공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근거를 찾고 싶은 것일텐데 바꾸어 말하면 재현을 하란 것이지 창의적이 되라는 말은 아닌 것이다.
언젠가 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꺼냈을 때 누군가 그랬다.
"책임질 수 있어? 이거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나는 현실적인 대안이기도 하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설명했지만 그는 과거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했다가 일이 잘못되면 책임을 질 수 있냐고 겁부터 줬다. '새로운' 시도라는 것은 과거에 선행했던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고, 해 본 적이 없으니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때 나는 실패 확률조차도 알 수 없는데 책임 문제부터 거론하는 것을 보면서 앞으로도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꺼내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 역시도 연차가 쌓일수록 자신있게 '저만 믿으세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어갔다.
많은 혁신 기업들은 직원들의 실패를 보장해 준다. 그래야 직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을 할 테니까. 사람이 걸음마를 배울 때에도 수도 없이 넘어지는 것을 반복한 후에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인데 '예전에 걸어본 적 있니, 아가야?'라고 묻는다면 누구도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물론 한 번의 실패가 회사에 큰 손실을 끼칠 수도 있고 극복하기 힘든 위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도 실패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안전한 길만 가겠다고 한다면 우리는 답습과 재현이라는 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농구의 전설, 마이크 조던의 1997년 나이키 광고가 떠오른다.
I missed more than 9000 shots in my career.
I've lost almost 300 games.
26 times I've been trusted to take the game winning shot and missed.
I've failed over and over and over again in my life.
That is why I succeed.
* 다행히도 네이버 검색을 해보니 서울시에서 야외 발코니를 설치할 수 있도록 국토부에 관련법 개정 건의를 한 상태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제 건설사 상무님들(?) 차례다. 사업 수익성, 최종 결재권자의 의중 등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이제 우리 아파트 문화를 바꿀 수 있게 부디 용기 내어 주셨으면 좋겠다.
"서울시가 아파트에 성인 6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야외 발코니를 설치할 수 있도록 제도 변경을 추진한다. 실내로 변경이 가능한 발코니 외에 추가로 작은 앞마당처럼 쓸 수 있는 공간 설치를 유도하는 것으로, 전용면적 84㎡ 주택의 경우 5 m×2.5m 규모의 외부 발코니를 갖게 된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집에서도 바깥공기를 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포스트 코로나(코로나19 발생 이후)’ 추세를 반영한다는 취지다.
29일 경향신문이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서울시는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 바깥으로 튀어나온 폭 2.5m 이상 발코니 설치를 유도하기 위한 ‘건축물 심의기준’ 개정안을 마련한 것으로 확인됐다. 건축물 심의기준은 서울시·자치구가 건축물 설계안을 심의할 때 적용하는 지침으로, 발코니의 형태와 길이 등을 세세하게 규정한다.
서울시가 아파트에 외부로 개방된 발코니를 도입하려는 배경에는 포스트 코로나 담론이 있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집에서 누릴 수 있는 옥외공간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는 진단이다. 물리적(사회적) 거리 두기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여가와 휴식 공간으로서 발코니나 테라스에 대한 요구도 함께 늘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거리 두기 시행 이후 발코니를 식음을 하거나 식물을 키울 뿐만 아니라 운동과 악기 연주를 하는 공간으로도 사용하는 모습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된 바 있다. 방과 거실을 더 넓히기 위해 발코니를 ‘확장 공사’를 통해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는 국내 상황과는 사뭇 다르다. (2021.9.29일 자 경향신문 허남설 기자의 '아파트에서 숨 쉬러 나간다, 발코니로···서울시 ‘오픈 발코니’ 넓힌다' 제하 기사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