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다시 쓰는 이력서

by a universal seoulite

모든 계획되지 않은 일들이 그렇듯 친한 언니의 '여기 한 번 써봐'라는 한마디에 불현듯 구직사이트를 켜서 이력서 작성하기 버튼을 눌렀다. 다시 이력서를 쓰는 게 무려 15년 만이다. 다시는 쓸 일 없을 것 같았던 이력서를 쓰자니 무슨 말부터 써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나른하게 깜빡이는 커서는 잘 써보겠다는 내 결연한 투지를 삽시간에 무력화시키고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의 상태로 나를 홀리고 있다.


'아이, 몰라! 일단 다른 거 하자. 지금은 집중이 안돼. 그래서 그런 거야.'


30분째 노려보고 있던 노트북을 덮고 딴짓을 하기 시작한다. 늘 그러하듯 내가 마감기한까지 이렇게 갖은 핑계를 대면서 최대한 미뤄두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자기소개서의 첫 문장, 단 한 줄이라도 써보자는 심정으로 노트북을 다시 열어 집중해 본다. 한 번 읽으면 뇌리에 꽂혀서 나라는 사람을 반드시 만나고 싶게 만들 날카로운 첫 문장을 쓰고 싶다. 하지만 최근에 글이라곤 카톡 대화창에 쓰는 단답형 문장 말고는 써본 적 없는 내게 놀랍게 번뜩이는 그런 극적인 문장이 떠오를 리가 없다. 나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다. 결국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문장으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기소개서 첫 줄을 끄적인다.


'저는 ooo 회사에 다니고 있는 15년 차 직원 ooo입니다.'


나를 소개하는 첫 문장이 이 정도밖에 안되다니 못내 아쉽지만 내 필력에 이게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눌러 내린다. 한편으로는 oo회사, 15년, 직함이 나를 압축적으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한 문장이라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도 든다. 사회적 계층과 경계가 명료하게 잘 드러나는 한 줄 설명이다. 저기에 만약 애플, 사장이라고 살짝 단어 몇 개만 바꿔도 아마 이 문장이 주는 느낌은 드라마틱하게 달라질 것이다. 혹은 100억, 자산가라는 단어를 넣어봐도 확연히 다르다. 한때 내가 원대하게 품었다 못다 이룬, 혹은 아직 못 이룬 것이라 믿고 싶은 꿈들에 가까운 것들이겠지.


한 줄 쓰고 나니 이제는 그동안 했던 15년 치 일을 어떻게 매력적이게 풀어쓸 수 있을지 막막하다. 다시 노트북을 덮어둔다. 그렇게 또 반나절이 지나고 자정이 다 될 때까지 외면하고 또 외면하다가 12시 마감시간을 앞두고 자리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마구 문장을 나열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쫓겨야 일이 되리라는 걸 알고 있던 터였지만 너무 막판까지 몰렸다. 여기저기 던져놓은 문장들을 도무지 어떻게 연결해 나갈지 해법이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글자 수 채우기부터 달성해 보기로 한다.


그럭저럭 분량을 어느 정도 달성하고 나니 희한하게 생각나는 대로 나열했던 문장들을 하나로 엮어낼 전체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럴 때 보면 가끔은 임기응변에 강한 타입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힘을 낸다. 정작 화가 나서 싸워야 할 때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 말 못 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하는 탈임기응변이면서 말이다.


나는 책 '나의 정원' 속 타샤 튜터 할머니가 정원을 대하듯 전체 스토리의 프레임대로 문장들을 조화롭게 배치한 다음, 가지치기하듯 무심하게 써놓은 날 것 그대로의 문장들을 하나씩 정성스레 다듬고 손질하여 보기 좋게 가꿔나간다. 내 낙천적 성격과 성실함이 문장에서 고스란히 배어 나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정성스럽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드디어 완결된 15차 경력 이야기가 생각보다 담백하게 잘 그려진 것 같아 뿌듯하다. 한편으로는 지난 15년 동안 별거 아닌 것도 별 거인 듯 말하는 기술이 많이 늘었구나 싶다. 에둘러 말하기조차도 서툴렀던 0101이 좋게 말해 사회 물 먹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표현을 구사하는 것이고, 극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사회 초년병 시절 내가 그토록 경멸했던 세속에 찌든 능구렁이 어른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장욱진이나 앙리 마티스처럼 대가의 경지에 오른 이후에도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예술혼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나는 마치 신춘문예에 지원하는 무명의 작가 지망생처럼 내 글을 다시 읽는 것이 오글거려서 눈을 질끈 감고 지원서 작성 완료를 누른 뒤 황급히 노트북을 덮는다.


생각보다 제법 많은 일들을 했고 생각보다 제법 열심히 살아온 내 15년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내 손을 떠나 전송되는 중이다. 그 스토리가 채택의 행운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상관없다. 귀찮음과 두려움, 새로움에 대한 거부감을 뿌리치고 15년 만에 다시 써 내려간 자기소개서만으로도 한 발짝 더 용기 낸 것 같아 뿌듯하니까. 오늘 밤에는 꿀잠을 잘 것 같다.




*0101: 0과 1, 두 가지 숫자로만 구성된 이진법을 모티브로 하여 사람들이 공대 출신인 나를 표현하는 애칭


사진출처 : 책, '타샤 튜터의 나의 정원' 중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