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쉽을 하는 동안 만난 스페인 친구 마리아를 만나러 바르셀로나에 갔을 때 일이다.
공항에 도착하면 마리아가 픽업을 나올 예정이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공항 입국장 문을 나서 눈앞에 서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몇 번을 훑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열렬히 나를 반겨주기로 한 말괄량이 주근깨 노랑머리 마리아가 없다. 어찌 된 일인지 조금은 당황스러운 나는 공중전화를 찾아서 마리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만 해도 스마트폰은 커녕 휴대폰 로밍 서비스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번호를 눌러봐도 '이 전화는 현재 꺼져있습니다. 삐 소리 후 메시지를 녹음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스페인어 안내 음성만이 계속 반복될 뿐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도착한 내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공항 잔디밭에 노숙을 하는 배낭여행객들이 보였다. 마리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시간에 호텔 찾기도 힘들 텐데 나도 저렇게 혼자서 노숙을 해야 하는 건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스마트폰이 없던 아득히 먼 옛날이었다.
1시간을 기다려도 마리아의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있었다. 공중전화에 붙어있는 스페인 전화번호안내 다이얼을 눌러 영어 안내를 신청했다.
"마리아를 찾습니다."
"성은 어떻게 되시죠?"
아뿔싸, 나는 마리아 성을 모른다. 그제야 너무나도 멍청하게 마리아 이름과 휴대폰 전화번호만 받아적은 채 여행책자 하나 없이 신용카드 한 장 달랑 들고 바르셀로나로 날아온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보 멍충이!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성은 잘 모르고,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마리아를 찾고 있어요. 휴대폰 번호는 있는데 혹시 집 주소라도 알 수 없을까아요오???"
내가 말하면서도 너무 한심했다.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마리아라니! '서울에 살고 있는 순희 찾아요'랑 뭐가 다르겠는가. 수화기 넘어 안내원이 화를 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밤중에 너도 참 딱하다며 혀를 끌끌 차진 않을까 생각하니 수화기 넘어 보이지도 않을 내 얼굴이 화끈거려서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결국 마리아를 찾을 수 없었다. 옆 동네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준비 없이 그냥 친구 이름 하나 들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는지 나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위험하고 경솔한 짓인가. 혹여나 연락 두절하고 연락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2시간이 지난 후, 마리아가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 칠흑 같은 까만 밤하늘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공항으로 오고 있다는 마리아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마리아는 타고 있던 배에 불이 나서 어쩌고저쩌고 연락이 늦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며 내가 아직 공항에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급한 마음에 가뜩이나 빠른 스페인 억양으로 어찌나 빨리 말하던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리아는 꼭 올 것이라는내 믿음이 틀리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었다.
바르셀로나에 여행 가는 게 기쁜 나머지 그냥 버스 잡아타듯 비행기 타고 날아간 내 젊은 날, 객기의 추억이다. 가끔은 그런 무모함과 용감한 실천력이 그립다. 회사생활이 지칠 때면 가끔 그렇게 훌쩍 마리아를 찾아 떠났던 그 밤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