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장은 달팽이

by a universal seoulite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주요 인물은 당연히 김 부장이다. 잠시 책을 폈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었다는 독자 리뷰가 많은 것을 보면 각지 구석구석 포진된 실사판 '김 부장'들이 이 땅의 많은 직장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 역시도 대한민국 어느 직장에나 흔히 있을 법한 상사의 전형, 김 부장 얘기를 읽으면서 과거 몇몇 상사들이 떠올라 '맞아, 맞아. 우리 회사에도 있지.' 하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럼 소설 속 김 부장은 누구인가. 그는 직급의 우월함을 과시하며 직원들의 의견은 존중하지 않지만 자기애는 흘러넘치는 전형적 꼰대 상사이다. 그에게는 회사가 전부이며 회사 밖 세상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랬던 그에게 회사는 더 이상 김 부장이 필요하지 않다고 한다. 회사는 그에게 시대에 맞는 변화된 리더십을 원했지만 김 부장은 뼈를 묻을 각오로 청춘을 받쳤던 회사가 자신의 충정심을 몰라주는 게 화가 날 뿐 회사가 김 부장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신입사원 시절이었을 때,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문화 중 하나가 집에 가지 않는 상사들이었다. 그들은 밥을 먹어도 회사에서, 잠을 자도 회사에서, 놀아도 회사에서 했기에 도대체 왜 집에는 가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아무 할 일 없이 뒹굴더라도 집이 편한 나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위로 줄줄이 상사들이 집에 가질 않으니 부하직원들도 눈치를 보느라 집에 편히 갈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때는 오래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찾으면 언제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는지가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의 바로미터로 여기지는 시절이었다. 물론 일이 있으면 남아서 열심히 해야겠지만 상사가 거나한 저녁 한 상을 먹고 돌아올 때까지 오매불망 결재 대기를 해야 하는 날이면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사무실 불이 꺼지지 않는 회사를 빗대어 '오징어잡이 배'라는 자조적인 우스갯소리가 유행처럼 번졌고, 어차피 퇴근을 할 수 없다면 저녁에 일을 몰아서 하는 게 낫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상사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과연 저분들은 가정에서는 행복할까? 집에 가기 싫어하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한 번은 과장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과장님, 이렇게 매일 야근하시고 주말도 없이 회사에서 일하시면 댁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이 없으실 텐데 가족분들이 섭섭해하시겠어요."


"무슨 소리야. 우리 집에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걸. 회사를 위해서 헌신하고 열심히 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사 안 가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과장님 가족들의 만족도가 궁금했던 것이 아니라, 쉬는 날도 없이 계속 출근하게 눈치 주는 상사에게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게 해 달라는 요청을 에둘러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을 들어보니 씨알도 먹힐 것 같지 않았고 잘못 말을 꺼냈다가 욕만 먹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회사가 더 낙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시만 하면 기호와 기분에 맞춰서 척척 알아서 해주는 직원들이 있으니 출근을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서 배우자와 아이들 눈치 보는 것보다는 그게 훨씬 속 편한 게 아니었을까.


나는 그들에게 집에 한시라도 빨리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제발 친구를 만나던 취미라도 좀 가져보라고 권하고 싶었다. 회사 밖에서 즐거움을 찾아 사람도 만나고 시간도 보내면 회사일을 잠시 잊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텐데 그들은 그저 회사밖에 몰랐다. 소설 속 김 부장처럼 그러다 회사를 나가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무개로 새 출발해야 할 텐데 취미도 취향도 없이 오직 '김 부장'에 과몰입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할 회사 이름과 직함을 달팽이 등 껍데기처럼 짊어진 채 오늘도 회사로 성실하게 향하는 김 부장은 등 껍데기 아래 가녀리고 연약한 자신의 무색무취한 맨 몸을 들여다본 적 있을까. 등 껍데기가 없어지더라도 반겨줄 친구들과 가족, 그리고 열정을 쏟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껍데기가 남긴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 텐데 김 부장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사진출처 : 우크라이나 사진작가 Vicheslav Mischen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