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에어팟, 그리고 크롬 캐스트
2. 에어팟
내 삶을 바꾼 세 가지 물건 중 두 번째, 에어팟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도 경리단길의 어느 카페에 앉아 굳이 카페의 재즈 풍 플레이리스트 대신 에어팟을 듣는 편을 택했다. 애플의 에어팟이 출시된지도 2년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 내가 에어팟을 산 것은 올해 4월 30일의 일로, 불과 두 달 반 남짓에 불과한 시간 동안 에어팟을 사용하면서 겪은 감상을 풀어보고자 한다.
처음 에어팟이 출시되었을 때는, 세간으로부터 약간 콩나물 같기도 하고 담배꽁초 같기도 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콩나물이나 담배꽁초라는 비유는 다소 과장되었다는 생각이 들며, 기타 블루투스 이어폰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에어팟의 디자인은 심플하고 심미적인 축에 속한다. 출시 당시 내 주변의 반응을 돌이켜보면 비단 디자인 이슈가 아니더라도 마냥 이 새로운 블루투스 이어폰을 긍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두 짝의 이어폰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걱정, 귀에 착용했을 때 미래에서 온 설정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돌출된 하얀 꽁다리, 전형적인 IT Geek처럼 보인다는 우려 등이 공존했다. (지금은 많이 보급화 되어서 이런 의견도 다소 사그라들었다.)
에어팟이 비판을 받았던 또 다른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애플은 야심 차게 아이폰 7의 이어폰 단자를 제거하고 에어팟을 함께 내놓았다. 이 말인즉슨, 이어폰을 사용하면서 아이폰을 충전을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플이 내놓은 솔루션이라고도 볼 수 있는 에어팟의 정가는 한국 발매 기준 21만 9천 원으로, 아이폰 7과는 별도로 구매해야 했기에 이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시 아이폰 6을 쓰고 있었고, 아이폰 6에는 여전히 이어폰 단자가 존재했고, 당연히 충전과 음악 듣기 활동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나에게 있어 에어팟 구매는 무기한 보류 상태였다.
그런데 에어팟을 샀다.
2017년 11월, 아이폰 X가 한국에서 정식 발매되었고, 아이폰 6과 작별했다. 매끈한 블랙 글라스 뒷면을 가졌고 홈 버튼이 사라진 아이폰 X는 M자 탈모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이 스마트폰을 구매했다. 아이폰 X는 아이폰 7과 마찬가지로 문제의 이어폰 단자가 없고, 다만 무선 충전을 지원하기 때문에 무선 충전기가 있다면 이어팟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충전할 수 있다.
에어팟 출시 이후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와이어리스'는 우리 일상에 녹아들었고, 주변 친구들로부터 에어팟에 대한 호평을 전해 들을 때마다 솔깃하곤 했다. 하지만 내가 이어팟으로 음악을 듣는 상황은 주로 사무실과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두 가지인데,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이 첫 번째 글감이었던 자동차가 생김으로 인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자동차에서는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지 않고 스피커를 쓰기 때문에 단지 사무실과 이따금 이용하는 대중교통 용으로 21만 9천 원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지 되짚어 보았는데 답은 '아니오'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IT 통신들은 금년에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도입한 에어팟 2세대의 출시 가능성을 점쳤기 때문에, 시기 상 나의 에어팟 구매가 한 친구의 표현을 빌자면 그저 "과도기적 신제품 수집가"라는 타이틀을 남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어팟을 정말 사야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내가 정말 음악 없이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따뜻한 4월의 어느 날, 나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착각마저 드는 스포티파이로부터 마음에 쏙 드는 음악을 추천받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 복도에서 화장실까지의 거리를 콩콩 뛰어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내가 있는 부서는 업무 시간에 음악을 듣는 것이 허용되고, 개인 자리에서 화장실에 가는 순간까지도 이어폰을 빼지 않고 음악을 즐겼던 것.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화장실 전신 거울 앞에서 유선 이어폰을 귀에 장착한 상태로 허리 중간께쯤 오는 선반 위에 아이폰을 올려두고 머리를 묶기 위해 팔을 뻗친 순간, 실수로 이어폰의 줄을 홱 내리쳐버렸다. 그러자 그 충격에 의해 선반 위에 올려둔 소중한 아이폰이 딱딱한 화장실의 돌바닥 위로 내동댕이쳐졌고, 나는 아이폰을 다시 집어 들며 조용한 분노를 꾹꾹 집어삼켰다. 그렇다. 모든 게 다 이 선 때문이다.
참 이상하게도 몇 개월 간 잘 참아오던 결정도 한순간의 결심으로 뒤엎히고는 한다. 에어팟이 사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은 후에도 이 것을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사기 위해 요리조리 머리를 굴려 보았다. 5월 연휴를 이용해 일본 여행을 갈 수도 있다는 친구는 엔저 현상으로 인해 한국에서보다 최대 7만 원 정도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구매를 부탁할 요량으로 또 일주일을 참았는데, 문제의 일본 여행은 그냥 해 본 말이었다. 그렇더라도 적어도 쿠팡 같은 소셜 커머스에서 3만 원이라도 싸게 에어팟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국내 유일의 애플 공인 스토어인 가로수길의 애플스토어에서 박수를 받으며 에어팟을 사는 상상도 해 보았지만 나는 이들 중 어떤 곳에서도 사지 않고 어벤져스를 보기 위해 판교 현대백화점에 주차를 한 4월 30일, 5시간 무료 주차 혜택을 받는다는 자기합리화를 하며 애플 대리 판매점인 케이머그에서 홧김에 에어팟을 사 버렸다. 단 1원의 에누리도 없이... 그리고 애플 스토어 지니어스 바 직원들의 셀레브레이션도 없이...
어쨌거나 에어팟을 사버렸고, 소중한 에어팟의 아름다운 패키지를 하나하나 풀어보는 경험은 그 자체만으로 선물이었다. 이어서 에어팟을 나의 아이폰에 처음으로 연결해 보았을 때, 360도로 회전하는 아름다운 제품 애니메이션에 혀를 내둘렀다. 페어링부터 커넥팅까지 이토록 매끄럽고 아름답게 이어지는 사용자 경험을 애플만큼 잘 만들어내는 회사도 없을 것이다.
음악과 함께 자유롭다
에어팟이 생긴 이후로는 사무실 환경에서 굳이 화장실에 아이폰을 가지고 가지 않는다. 음악을 듣기 위해서 반경 20m도 되지 않는 동선마다 한 손에 아이폰을 들고 끈에 얽매여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사무실에서 하루 평균 화장실을 5번 정도 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것은 대단한 편리함이다. 어쩌다 멍청한 선을 툭 건드려서 아이폰을 떨어뜨릴 일이 없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리고 이 것은 특수한 경우이지만, 우리 회사처럼 보안 유지가 중요한 회사에 다닐 경우 출문할 때마다 보안 게이트를 통과하게 되어 있는데, 소지한 핸드폰을 보안 게이트 옆 거치대에 두고 몸만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이어폰을 끼고 있을 경우 이어폰과 핸드폰을 분리하거나 귀에서 이어폰을 분리하고 게이트를 통과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에어팟을 구매한 이후로는 이런 반복적이고 불필요한 작업이 말끔히 생략되었다. (하지만 이 것은 나의 회사로부터 비롯된 너무나 특수한 장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이 기능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과 일체 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에어팟이 끊김 없는 음악 감상과 함께 부여해주는 신체의 자유로움이 몹시 마음에 들 것이다. 유선 이어폰을 쓸 때 종종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인 엉킨 선을 풀어야 하는 귀찮음도 당연히 없다.
이름을 불러 주세요
내가 에어팟을 주로 사용하는 환경은 특히 사무 공간에서이다. 나의 업무 시간은 대체로 음악을 듣고 있어도 될만큼 자율적이라서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나는 에어팟을 끼고 있다. 하지만 회사다 보니 계속 음악을 들을 수는 없고 팀원들 중 누군가가 질문이나 논의할 내용이 있어서 나를 부르는 상황이 생긴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있어서 돌아볼 때 보통 핸드폰에서 음악을 스탑 하기보다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곤 하는데, 같은 상황에서 에어팟은 듣고 있던 음악을 일시 정지시켜준다. 대화가 끝나면 빼고 있었던 한쪽 이어폰을 다시 착용하고, 내가 듣고 있었던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음악이 재생된다. 음악을 듣는 경험이 훨씬 쾌적해졌다.
나는 특별히 음악을 사랑해
에어팟 착용 후 대중교통을 처음 타 봤고, 이 것이 나처럼 과시적 성향을 지닌 IT 인간에게 정서적으로 유익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에어팟을 사기 전까지는 관심도 없었는데, 구매 이후 지하철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9호선 4량 열차의 첫째 칸에서 무선 이어폰을 소유한 자가 나뿐이며 나머지 다수는 기존의 이어팟이나 비츠 바이 닥터드레 이어폰, 혹은 갤럭시 구매 시 함께 제공되는 삼성 이어폰을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낸다. 물론 음악을 어떤 디바이스로 듣든 간에 그것이 그 사람이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지표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해당 디바이스의 가격이 얼마냐가 척도가 될 수도 없다. (따지고 보면 에어팟보다 값비싸고 유려한 성능을 자랑하는 블루투스 이어폰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내가 에어팟을 구매한 이유가 음악 없이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고로, 그리고 애플이 아이팟과 아이튠즈, 이들의 계보를 잇는 애플뮤직을 탄생시킨 유달리 음악을 사랑하는 기업이라는 고로, 지하철에 탄 좌중을 쓱 훑어보며 내가 에어팟을 착용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 내가 특별히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기분이 들고는 한다. 이 것은 어디까지나 말도 안 되는 개인적인 만족감으로, 나에게 항의를 제기할 유선 이어폰 사용자가 줄을 설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처음 나이키 한정판 신발을 신고 나왔을 때의 특별한 기분과 비슷한 종류의 만족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이키 신발을 신은 사람도 많고, 내가 가진 나이키 한정판 신발도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지만 어쨌든 현재 내가 새로 산 나이키 한정판 신발을 신고 있고 일반 나이키 신발을 신은 사람들을 보았을 때 느낄 법한 만족감...) 에어팟 덕분에 평소에는 그토록 꺼리던 붐비는 9호선 열차 안에서도 나만의 소확행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에어팟을 착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왜인지 반갑다.
+ 뭐니 뭐니 해도 이렇게 에어팟을 빛나게 하는 건 역시 풍요로운 음악과 멋진 팟캐스트들이다. 훌륭한 뮤직 스트리밍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글이 생각보다 길어진 나머지 크롬 캐스트에 대해서는 3편에 마저 쓰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