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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견주 Jun 24. 2022

6월 23일 구척장신의 준결승

스포 있음

#골때리는그녀들


언더독을 응원하고야 마는 운명들이 그렇듯, 나는 "골 때리는 그녀들" 시즌 1부터 나도 모르게 FC 구척장신을 응원하고 있었다. 모든 팀의 경기를 재밌게, 흥미진진하게 지켜본다고 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패스 플레이들을 훈수 두면서도 구척장신의 골이 나올 때면 코멘트조차 하지 못하고 감격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아이린이 샤워하면서 선방 영상을 끊임없이 돌려본다고 했을 때나, 이현이가 패배의 순간에 분에 못 이겨 땅바닥을 주먹으로 쳤을 때, 그런 강렬한 순간들이 그들의 웃음을 기도하게 만든 것 같다.



나는 노력에 비해 항상 좋은 성적을 거뒀었다. 초등학생 때, 빨간 펜이라는 학습지 하나를 하면서 전교 2등을 해서 지역에서 유명하던 ㅇㅇ 학원생들이 전부 나보다는 못했을 때, 빨간 펜 선생님은 "빨간 펜이 ㅇㅇ학원을 이겼다"고 기뻐했었다. 그런 기억들은, 누군가를 별 노력 없이 이겨버린 일들은 여태까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 자만들이 나를 '노력'의 멋짐에 취하게 만든지도 모른다.



나는 근데, 노력으로 똘똘 뭉친 구척장신이 우승할 줄 알았다. 지난 시즌에 낮은 성적을 기록했다는 불명예로 신생팀이랑 싸워야 했던 그들이 쌓아온 땀에 쩔은 시간들이 빛을 발해서 드라마처럼 우승할 줄 알았다. 액셔니스타와의 경기에서 이현이가 오랜 친구인 이혜정을 적으로 만나 "같은 팀이었음 좋았잖아." 라며 울먹이던 순간들이, 전통의 강호 불나방을 이겼던 김진경의 킥이 전부 우승으로 가는 서사라고 생각했다. 국대패밀리에 이정은이라는 걸출한 선수가 있어도, 구척장신이 쌓아온 팀웍과 승리의 시간들과 땀방울들이 그런 재능 따위는 이겨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슬램덩크에서도 북산고의 기적은 끝이 나는데도.



나도 근데 솔직히, 동네에서나 알아주는 성적이었지, 사회에 나와보니 나의 재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전교 1등이었는데, 전교 1등들을 모아놓은 대학교에 가니까 학사 경고였고 취업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인지 구척장신이 3:0으로 지는 순간부터 계속 울고 있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힌 나의 모습이 자꾸만 겹쳤다. 심지어 그들의 직업은 축구 선수가 아니고 이건 취미로 하는 축구 경기 중에 한 경기일뿐인데. 이정은이 골을 넣을 때마다 너무 부럽고, 너무 질투 나고, 너무 감탄스러웠다. 딱 저기에 골을 넣을 공간이 있는데, 집중력 잃었으면 그냥 밖으로 빠지는 공인데, 이정은은 악착같이 해냈고 해트트릭을 하고 나서도 한 골을 더 넣으려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승부가 이미 엄청나게 기울어진 상태인데도, 동료의 골을 완벽하게 어시스트하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이 정도로는 해야, 아니 이 정도로 만족하지 않아야 '재능'이다, 라는 걸 보여주는 것처럼.



근데, 전미라는 그게 노력이라고 했다. 그런 플레이가 너무 당연하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이정은과 둘이서 패스 플레이를 질리도록 많이 연습했다고. 연습한 걸 실전에서 발휘한 것뿐이고, 발전해나가는 과정이라고 - 목적지도 아니고 - 했다. 부럽고 재수 없으면서도 담담하게 노력을 말하는 그들의 열심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그들은 또 너무 당연하게 결승을 보고 있었다. 이 (작성자 기준) 눈물의 준결승이 그저 잘 지나가면 되는, 지원자 서류 스크리닝 정도의 과정인 것처럼. 부러웠다.



그냥 내가 과몰입하는 건지, 우연찮게도 나는 지금 이직 준비 중이어서 평생 가고 싶었던 회사에 지원한 뒤 1차가 붙은 상황이었다. 최종 면접이 매우 어렵다는 이유로 "어차피 떨어질 거야~" 라며 준비도 적당히 하고 합리화부터 하고 있었는데, - 일단 면접 준비할 시간에 티비를 보고 있는 것부터 - 타이밍 기가 막히게 차수민이 "이렇게 끝낼 거야?"라고 호통쳐서 깜짝 놀라게 된 것이다. 이렇게, 다 기울어진 경기라고 나는 이렇게 끝낼 셈인 건가? 스코어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백지훈이 한 골 씩 쌓아가면 된다고 하는, 이현이가 눈을 뒤집고 달려가서 마지막 볼터치를 하는 순간에 감동받아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내 도전은 이렇게 멋대가리 없이 끝내버려도 되는 걸까.



구척장신은 결국 준결승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하고 6:0으로 대패했다. 근데, 누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정말 분개할 것이다. 그 많은 아이린의 선방의 순간을 보았냐고. 하프 타임과 작전 타임에 괜찮다고 만회할 수 있다고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자책하던 선수들과, 잘하고 있다고 세뇌하듯 되뇌던 다짐들이 결과가 나쁘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냐고, 지레 찔려서 악 지르게 될 것이다. 내가 최종 면접에서 탈락하면, 이 커리어를 위해 노력해왔던 것들이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 나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한테 밀리는 건, 그냥 내가 웃으면서 쿨하게 감수하면 되는 일일까.



이현이가 인터뷰에서 그랬다. 노력이 이기는 거야말로 드라마 각본이라고. 이게 현실이라고. 근데 이정은도 이 재능을 가지고 다른 선수들만큼 노력했으니 어쩌면 이 승패가 당연한 결실일 것이다. '이강인 누나의 재능'이라고 축약하는 게 이정은한테는 무례 인지도 모른다.(물론 그가 T라서 천재라는 칭찬을 좋아할 수도..) 이거야말로 현실일까. 내가 이 필드에서 가지고 있는 재능은 이현이만큼일지도, 아니면 이윤석 정도 - 내가 아는 운동에서 가장 먼 사람 - 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의 능력을 평가해주는 감독이 없으니까, 평생 모르고 적당히 만족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구척장신이 네 번째 골을 먹은 순간, 승패가 완연히 기울어진 순간이 내 인생에 몇 번이고 있었고 앞으로도 몇 번이 더 있을지 모른다. 그 순간에서 억지로 때워야 하는 남은 시간들을 패배와 포기의 장면으로 보내지 않아야 하는데, 2022년 6월의 내가 딱 그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정도 재능은 아닌 것 같다고 매번 실감하면서, 그 실감할 수 있는 문제들마저 외면하고 있는. 굳이 도전하지 않아도 지금도 적당히 행복하다며.



근데, 구척장신도 골때녀의 지난 시즌뒤에서  번째...에서 이번 시즌 슈퍼리그까지 올라와서 3, 4위전을 앞두고 있는데, 그들이 여기서 만족한다고 하면 나라는 구척장신 팬은 몹시 언짢은 것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거둘  있었는데  나쁘게 - 여기부터 울먹인다 - 밀린 거잖아. "남은 후반전, 포기하지 말고 멋지게 끝내자." 어쩌면 내가 최종 면접 전에 가장 필요했던 말을 차수민이 해주고. 정말 나라는 소시민이 응원할 수밖에 없는 구척장신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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