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신의 결혼 준비 블로그 아닙니다
"말해줘서 고마워."
"그럴 것 같았는데 먼저 말을 못 꺼내기가 그랬어."
"아 진짜? 전혀 못 느꼈어."
내겐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모의 이혼이라는 사실을 공개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정말 머쓱했다. 왠지 숨기는 것 같이 보일까 봐 밝히면 갑자기 동정받게 되는 분위기가 어이없었다. 굉장히 유행했던, "어쩌라고? 마라탕이나 먹으러 가자."라는 반응은 이 정도로 가벼운 공개 선언일 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아녔을까. 아무튼 한 때는 그냥 이마에 써놓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하기조차 귀찮은 나의 개인정보였는데, 정말로 부모의 이혼 사실을 찌라시처럼 뿌려야 하는 때가 왔다. 청첩장을 찍게 된 것이다.
김ㅇㅇ, 이ㅁㅁ의 차남 김ㅅㅅ
박ㅈㅈ의 장녀 박ㅊㅊ
"차남"과 "장녀"를 같은 선상에 두느라고 우리 아빠의 이름이 휑한 가운데 정렬로 놓이면서, 어쩐지 부모 두 명 몫을 다하는 한부모처럼 위시되어 버렸다. 청첩장 미리보기를 할 때, 숨기고 싶은 마음에 연락도 안 되는 엄마의 이름을 넣을까 잠시 고민했었다. 어차피 식 당일에는 혼주석에 누가 앉든 아무도 관심 없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접었는데, 청첩 모임에서 지인들이 청첩장을 펼쳐 들고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를 때 - 물론 그런 종류의 침묵이 전혀 아니고 나의 피해의식이다 - 역시, 그냥 엄마 이름을 넣을 걸 그랬나 싶다.
나는 여자 형제가 있다. 예전에 외동인 친구에게, 지금 생각하면 참 속 보이는 머저리 같은 질문이 아닐 수 없는데, 형제가 없어서 외롭지 않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친구는 친절하게도, "없어봐서 모르겠어."라고 답해주었었다. 엄마의 부재를 밝힐 때마다 친구 부모님들은 저런, 힘들겠다, 외롭겠다, 는 반응을 보이곤 했었다. 엄마와의 마지막 기억은 7살 즈음으로, 사실 나도 뭐가 외롭고 힘든지 '엄마가 없어봐서 모르겠다.' 그러나 졸지에 숟가락으로 밥만 먹어도 기특하고 장한 아이가 되었으므로, 칭찬을 즐기기로 했었다.
나의 결핍을 남의 말로만 듣고 살다가, 엄마의 부재에 부딪히게 된 때가 청첩장 찍기 전에도 한 번 있었다. 대학생 때 봉사 프로그램으로 청각 장애가 있는 유치원생 아이들의 에버랜드 소풍을 돕는 프로그램에 나름 의욕을 가지고 참가했었다. 용인에 위치한 초등학교의 병설 유치원이었고, 학교에 도착한 뒤 방향을 몰라 교문 근처를 얼쩡거리고 있었는데, 나를 굉장히 잘 큰 초등학생으로 인지한 경비아저씨가 빨리 수업 들어가라고 야단치셨었다.
머쓱해하는 경비 아저씨께 병설 유치원 가는 길을 안내받았고, 만난 유치원생들은 작은 귀에 보청기 같은 기계가 있어 - 인공 와우였나? 있는 친구들도 있고 없는 친구들도 있었던 것 같다 -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봉사 내용 자체는 매우 쉬웠다. 그냥 애기들이다 보니 에버랜드에서 손을 꼭 잡고 놓치지 않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나 말고도 다른 봉사자들도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다 같이 대절 버스를 타고 가서 에버랜드에서 작은 손을 양손에 꼭 잡고 교사 분들을 따라 열심히 돌아다녔다. 불쌍한 애기들을 돕고 있다는 생각에 보람도 느끼면서. 알량한 동정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소풍이 끝나고 대절버스를 타고 유치원으로 돌아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나에겐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져있었다. 유치원생들의 부모들이 다들 데리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손을 붙잡고 다니던 안쓰러운 애기들은 종알 종알 떠들면서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한 둘 씩 집에 갔다. 부모들은 알아듣기 힘든 발음들을 다정하게 들어주었다.
나는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주 어릴 때에도 누군가 나를 데리러 온 기억은 없었다. 엄마는 물론이고 아빠도. 생각할수록 실소가 나왔다. 우리 아빠가 맨날 하는 말 중에 "불우이웃 돕기를 왜 하냐. 내가 불우이웃이다"라는 내가 진짜 싫어하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 말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나한테는 없는지도 몰랐던 부모로부터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인데, 누가 누굴 불쌍해하는지. 쪽팔렸다. 그 후로는 한동안 봉사를 가지 않았다.
에휴, 어쨌든 결혼은 가족 간의 결합이라더니, 단출한 우리 가족의 결핍을 이렇게나 동네방네 내보여야 되는지 로맨스에 빠져있을 땐 생각도 못했다. 다행히도 청첩장을 보고 내게 무례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전혀 없었지만, 어쩐지 직장 동료들에게 나눠줄 땐 아직도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래요, 편부모 가정의 장녀가 결혼한다는 내용의 청첩장입니다. 하지만 내 애인은 양친이 살아계십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겠지만 청첩장의 필수 내용이라 어쩔 수 없이 기재합니다. 대단한 출생의 비밀도 아니고, 역경이 많았던 성장캐의 슬픈 언약식도 아니니 그냥 혼주 한복비 아꼈다고 생각해주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