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 시절 어머니에게 썼던 편지.
그는 예상치 못하게, 길어졌던 대학원생의 삶 속에서, 그가 지금까지 그가 해온 모든 선택들이 오로지, 온전히 그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적의 그는 그의 삶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 온전히 그의 똑똑한 머리와 노력만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그러므로 그가 받는 혜택들에 대해서 응당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삼십 대를 지나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어머니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당시에, "박사를 과연 그가 졸업할 수 있을까"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 당시의 어버이날에 그가 어머니에게 썼던 편지를 꺼내어 본다.
엄마, 내가 사랑하는 엄마. 오늘은 어버이 날이야. 엄마는 늘 우리 집에서 어머니면서, 아버지였으니까. 그러니까 어버이날에 너무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 물론, 엄마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하나의 역할만 해내기에도 참 힘든 건데, 우리 엄마가 그동안 참 고생 많았지. 엄마. 매번 어버이날이 되면 엄마의 둘째 아들은 오랫동안 반성을 해. 좀 짜증 내지 말고 투정도 부리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게 말이야.
오늘은 나는 낮에는 논문을 좀 쓰고, 저녁 즈음에는 엄마 선물을 사려고 백화점에 나가서 돌아다녔어. 다들 어버이날에는 건강식품을 하지만 그런 걸 선물하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런 거 말고, 엄마가 좋아할 어떤 스카프나, 뭐 그런 거, 엄마가 평소에 하고 다닐 수 있는 것들을 사려고 했어. 그런데 한참을 돌아다녔는데도 뭘 사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 나는 아직도 엄마가 어떤 색을 좋아하는지, 평소에 어떤 옷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잘 모르니까. 물론 다른 사람의 취향을 안다는 게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엄마랑 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여전히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빈손이야. 엄마가 다음에 언제 사러 같이 가자. 그래야 나도 엄마가 뭘 좋아하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아.
예전에도 자주 했던 말이지만, 나는 엄마가 나에게 베풀어준 사랑과 정성이 늘 신기하게 느껴져. 그 마음이라는 것이,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싶기도 해. 엄마의 아들은 늘 과학이나, 논리를 따져대는 피곤한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래서, 늘 따지고 이유를 묻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는데, 엄마는 나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거야, 나한테 엄마라는 사람의 존재는.
우리가 이사 온 다음에, 아니 사실은 그전부터 엄마는 엄마의 역할도 아빠 역할도 꽤 오랫동안 해왔었어. 바쁘게 두 아들을 키우면서 엄마도, 엄마도 쉬고 싶었겠지만 엄마에게는 그런 여유는 사치였을 거야. 엄마는 부지런해야만 했고, 앉아 있는 것보다는 시간을 쪼개어서 집안일이든 무엇이든 하는 것이, 필요했으니까.
얼마전 티비에서 드라마를 보는데, 드라마에서 엄마와 아빠 역할을 동시에 하며 바쁘게 지내는 엄마에게, 아들은 엄마에게 “엄마는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해”라며 불평을 하더라고. 그 모습이 꼭 나 같은 거야. 그래서 또 한참 생각을 했어.
그런 엄마에게, 나는 몇 년 전부터 엄마에게 늘, “엄마는 왜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하곤 했어. 속상하다고. 그럴 때도 있지만, 엄마, 나는 엄마에게 느끼는 서운함보다 엄마에게 느끼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훨씬 커. 그냥 가끔은 그때의 작은 감정이 삐죽하고 튀어나와서 잊어버리는 거니까. 그렇게 튀어나오는 감정들은 늘 ‘고마움’ 같은 게 아니고, ‘서운함’ 같은 거니까.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함부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나도 잘 관리해볼게 엄마.
얼마 전 엄마와 삼촌과 함께 여행을 갔을 때, 생각을 해보니까 엄마랑 같이 여행을 간 것이 정말 오랜만이더라고. 형도 같이 갔으면 좋았겠다, 라는 생각도 한참 했어. 물론 가서 또 우리가 서로 싸우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게 여행인 거지 엄마. 그리고 여행 내내 엄마가 참 기분이 좋아 보이더라고. 참 많이 웃고 농담도 많이 하고. 그러게 엄마한테도 그렇게 밖에서 콧바람을 쐴 시간들이 필요했을 텐데 그동안 그런 시간들이 참 없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나도 한참 생각했어. 우리 엄마도 노는 거, 놀러 다니는 거 좋아하고 여유 있게 사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지. 다음에는 엄마, 형이랑 나랑 같이 놀러 가자. 내가 준비해볼게.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삶이 잘 풀리지가 않고 있으니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조금 남아있으니까. 가끔은 그게 끝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감이 나를 덮치기도 해. 그래도 그 불안감이나 마음들을 잘 추스르는 습관을 만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거든. 아직은 내가 배울 것들이 남아 있고, 더 나아질 부분이 있으니까, 졸업이 잘 안되고 있는 것이겠지. 아직 배울 것이 남아있는 거니까. 어쨌든 나는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요즘에는 내 나름대로 이러한 고난 속에서도 부수고 나아가면, 앞으로는 어떤 스트레스나 힘든 상황이 와도,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실제로 그렇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려고. 그리고, 나는 어쨌든 앞으로 좋아지고 행복해질 날만 남았으니까.
다만, 그런 생각으로 나를 달래다가도 가끔은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지금의 엄마와 과거의 엄마 모두에게. 그러면서 젊었을 때의 엄마에게 나의 기회들이 주어졌다면 우리 엄마는 훨씬 슬기롭게 헤쳐 나갔을 텐데. 그런 생각들이 들어.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에, 두 아들을 키우면서 일까지 했는데, 나는 엄마가 엄마가 되었던 나이보다 더 많은 상황에서도, 혼자의 몸을 관리하는 것마저 가끔 힘에 부치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금 나의 부족함이 과거의 엄마에게 미안해지고, 또 지금의 엄마에게도 미안하다는 마음이 드는 거지. 우리 엄마가 나처럼 많은 시간이 주어지고 같은 학교에 들어와서 공부를 했다면 엄마는 더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갔을 텐데. 물론 엄마는 지금도 멋지지만.
나도 내가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이렇게 대학원생으로 있을지는 진짜 몰랐지. 열심히 하니까 나아질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내 자력으로 부수하고 앞으로 나아간 것도 있지만, 뭐, 결국은 핑계지만 운이 좀 없나,라고 생각하려고 해. 그래도, 여전히 엄마에게는 늘 미안해. 내가 얼른 회사에 가고 돈을 벌어서 엄마에게 그동안 내가 엄마에게서 내가 받았던 여유들을 되돌려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마음 한편이 조금은 아려. 그래도, 그 날이 올 꺼고, 좋아질 거니까, 라는 말로 나를 달래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 그래도 그러지 않으려고 하지.
동시에, 나는 알고 있어.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꽤나 이기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살았지. 요즘은 가끔 나 대학교 원서 쓸 즈음에, “의대는 갈 마음 없니?”라고 물었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나. 나는 아마도 그때 매우 단호하게, “아니, 엄마 그런 생각 없어”정도로 대답했던 것 같아. 지금도 나는, 의대 공부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의대를 갔다면 지금처럼 오랫동안 돈도 벌지 못하면서 주위의 사람들을 힘들게 하지는 않았겠지, 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 물론 모를 일이야. 의대를 갔어도 거기서 힘들게 지냈을지도 모르지만.
그거 말고도, 나는 늘 내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어. 학부 때도 집을 생각하면 좀 더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했고, 대학원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늘 모든 순간에서 나만을 생각하면서 살았다. 문득 돌이켜 보니까, 나는 늘 그랬더라고. 부끄러워서 너무 하나하나 다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랬어.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늘 나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것들이 모두 엄마의 삶과 형의 삶들에 빚져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책하지는 않으려고 해. 자책을 하다 보면 내가 좀 너무 슬퍼지더라고. 나를 심하게 자책하게 되고. 나의 상황은 좋아질 거고, 내가 엄마와 형에게 그 마음들을 되돌려 줄 수 있는 상황이 올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야지.
엄마는 참 재주가 많으니까. 노래방 가면 우리 엄마는 노래도 참 잘 부르고, 어릴 때 엄마가 노래방 가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던 기억이 아직 있어. 최진희의 “천상 재회”였는데. 내가 아직도 엄마 그 노래 제목을 기억한다. 그리고 엄마는 지점토로 예쁜 작품들을 만들어서 집에 붙여두기도 했고, 그게 나중에 고리 부분이 떨어져서 깨지기는 했지만. 내 바지를 만들어주기도 했지. 생각해보니, 바지를 만든 것도 엄마는 돈을 아끼려는 마음이기도 했겠다. 진짜 우리 엄마 대단한 사람이야. 나는 지금도 엄마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
엄마 아들이 나이를 먹고 자신의 욕심과 자아가 생기니까, 엄마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엄마 그건 내 태도의 문제고 나는 늘 엄마의 말을 경청해. 그래도, 내가 만나는 어떤 사람보다도 엄마의 말을 제일 경청해. 물론 그게 엄마의 말을 그대로 수용한다는 말은 아니고, 앞으로도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것처럼 따질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엄마의 말을 잘 듣고 있어. 아마도 앞으로도 엄마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지는 않겠지만ㅎㅎ. 나도 내 마음이 있으니까. 그래도 엄마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보려 노력할게. 나는 늘 엄마의 의견을 들어. 가끔 내가 지치면 듣고 싶지 않아서 입이 삐죽 나올지는 몰라도.
어버이날 엄마를 생각하면서 편지를 쓰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돼. 사실 그런 마음들을 되짚어 보면 끝이 없거든. 엄마에게는 늘 미안하고, 그래도 나도 결국 이 터널을 지나고 나면 좋아질 거니까, 엄마에게 내가 받은 여유를 선물해줄 수 있을 거야. 엄마 아들은 지금도 환생 같은걸 믿지 않지만, 그리고, 옛날에는 엄마가 다시 내 엄마로 태어나줬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지만, 생각해보니까 그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다음 세상이 있다면 그때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 재주 많고 똑똑한 우리 엄마 내가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대학원도, 아 아니 엄마 대학원은 가지 말아. 별로 안 좋은 것 같아ㅎㅎ농담이고 다 보내주고 행복하게 해 줄게 엄마. 진심으로.
엄마, 내가 엄마 아주 많이 사랑하고, 늘 고마워. 나에게도 엄마에게도,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도 더 좋은 날이 올 거야. 엄마 행복하자 우리 가족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