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없는 사랑의 세계로
"신에 대해 누가 무엇을 알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신에 대한 무수한 관념과 견해와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모두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다."
제19장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주제를 다룬다. 신, 그리고 신성과의 관계다. 저자는 먼저 우리가 가진 신에 대한 모든 관념이 인간의 해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교리도, 가르침도, 모두 사람의 손을 거친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행히도 우리의 깊은 내면에는 신성과의 직접적인 연결점이 있다." 신을 아는 것은 책이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직접적 경험을 통해서다. "개인적 자아를 초월한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선택이 등장한다. "당신은 마음이나 몸 대신 그 부분과 하나가 되기를 의식적으로 택할 수 있다." 마음이나 몸과 동일시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초월한 부분과 동일시할 것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다.
이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하면 자연스러운 변신이 당신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억지로 만드는 변화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변신이 일어난다. "이 변신을 지켜보는 동안 시간이 지나면 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경험이다. "당신은 실제로 영(spirit)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알기 시작한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당신의 내면에서 목격되는 변화는 당신이 다가가고 있는 그 힘의 반영이다." 내면의 변화가 곧 신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저자는 우리의 경험을 상기시킨다. "당신의 삶에서 분노와 회한과 부정적인 생각들에 깊이 사로잡혔던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다. "그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당신은 안다."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그런 기분일 때 당신이 타인들에 대해 어떤 느낌을 느끼는지도 안다. 가슴의 느낌이 어떠하며 어떤 생각과 행위가 나오는지를 안다." 분노와 부정적 생각에 사로잡혔을 때,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가슴은 닫히고, 부정적 생각과 행위가 나온다.
"그 공간을 당신은 잘 안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이다." 이것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직접 경험한 실제 상태다.
그렇다면 성장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부분을 지나서 성장하면 당신은 그 긴장과 불안의 느낌으로부터 떠나온다." 성장은 그 낮은 상태에서 떠나오는 것이다. "당신은 앉은 내부의 장소로부터 그 낮은 진동수의 구름이 점점 멀어져갈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나온다. "구름은 아직도 거기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을 사로잡을 수 없다." 분노나 부정적 생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사로잡지 못한다.
왜 그런가? "낮은 수준의 진동을 풀어놓으면 당신은 저절로 그것이 자신이라거나 당신이 그것과 상관이 있다는 생각을 그치게 된다." 그것을 내가 아니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놓아보내면 당신의 영(Spirit)이 떠오른다."
영이 떠오르면 어떻게 되는가? "영이 떠오르면, 당신이 원하지 않은 일이 아직도 일어나지만 그것이 당신을 크게 건드리지 않는다." 원치 않는 일은 여전히 일어난다. 하지만 그 영향이 다르다.
"그것이 당신이 있는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지 않는다." 표면은 흔들릴지 모르지만, 깊은 곳은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건에 반응하는 당신의 부분 뒤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반응하는 부분 뒤로 물러나 있으면, 사건이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영과 동화되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 "형상보다 영과 더 깊이 동화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저자는 대비를 통해 설명한다. "당신은 불안과 긴장을 느끼며 돌아다니곤 했다. 이제 당신은 사랑을 느끼며 걸어다닌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사랑을 느낀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랑을 느낀다. "당신의 배경이 사랑이다. 당신의 배경이 열림과 아름다움과 음미이다." 사랑이 삶의 기본 배경이 된다.
"그렇게 느끼려고 일부러 어떻게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영의 느낌이다." 노력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 영의 본성이다.
저자는 마음과 영을 대비시킨다. "마음은 어떤가? 당신이 정말 솔직하다면 아마도 불만과 두려움으로 꽉 차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 마음의 기본 상태는 불만과 두려움이다. "그러면 영은 보통 어떤 느낌일까? 진실을 말하자면, 그것은 언제나 좋은 느낌, 언제나 고양된 느낌이다. 그것은 언제나 열려 있고 가벼운 느낌이다."
이런 차이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이 때문에 당신은 자연히 자신의 영적인 부분에 점점 더 중심을 두기 시작한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영으로 중심이 이동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을 찾는가? "영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닌 것들을 다 놓아보냄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것이 핵심이다. 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영이 아닌 것들을 놓아보내는 것이다. "그 밖에는 정말 다른 길이 없다."
왜 그런가? "개인적 자아는 영을 만날 수 없다. 개인적 자아는 놓아 보내야 한다." 개인적 자아가 영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자아를 놓아야 영이 드러난다. "그것을 놓으면 당신은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내면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가? "자신을 하나의 개인으로 인식하는 의식의 물방울이 충분히 깊숙이 들어가면 그것은 대양 속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된다." 이것은 아름다운 비유다. 개인 의식이 물방울이고, 신성이 대양이라면, 깊이 들어갈수록 물방울은 대양과 하나가 된다.
"개인의 의식이 우주적 일체성 속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끝이다." 개인적 의식의 끝이 곧 우주적 의식의 시작이다. 분리가 끝나고 하나됨이 시작된다.
이렇게 우주적 일체성과 연결되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아이들이 마치 내 자식 같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색깔과 모양과 소리와 표현법을 지닌 아름다운 꽃처럼 보인다면 어떨지를 상상해보라."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 경험이다. "당신은 더 이상 분별과 심판을 하지 않는다. 분별과 심판의 작용이 그저 멎어 버리는 것이다." 노력해서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는 작용 자체가 멈춘다.
그 자리에 무엇이 오는가? "오로지 음미와 감사와 존중만이 있다. 단정과 비판만이 있던 곳에 이제는 존경과 사랑과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있다." 심판이 사라진 자리에 사랑이 온다.
저자는 두 가지 태도를 대비시킨다. "가리고 따지는 것은 분별이요 심판이다. 보고 경험하고 존중하는 것, 이것이 뒷전에서 심판하지 않고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심판은 거리를 두고 따지는 것이고, 사랑은 삶 속으로 직접 뛰어드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오는가? "신은 실질적 체험을 통해 온다. 명상을 할 때 일어나는 일이 그것이다. 낮은 차원의 자아를 놓아 보낼 때 일어나는 일이 그것이다." 신은 개념이나 믿음이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해 온다.
이제 저자는 신의 본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한다. "신은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어떨까? 신은 사랑이라면?" 이것은 가설이 아니라 저자가 확신하는 진실이다.
"진정한 사랑은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봤다면, 그것이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사랑은 대상 속에서 오로지 아름다움밖에 보지 않는다. 불순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순한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무엇을 바라보든 모두가 아름답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보는 방식이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아름답다. 불순한 것, 더러운 것, 나쁜 것이 없다. 오직 아름다움만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배워왔는가? "당신은 신성의 힘에 의해 온전히 보호받고 사랑받고 존중받는 느낌을 느끼도록 고무받는 대신, 신은 인간을 심판한다고 배워 왔다." 사랑받는 느낌 대신, 심판받는다고 배웠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렇게 배웠으므로 당신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죄책감과 두려움은 신성에 이르는 통로를 열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가슴을 닫아거는 역할을 할 뿐이다." 심판의 신 개념은 우리를 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진실은 무엇인가? "그러나 사실은 신은 사랑이고 당신이 직접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순간만이라도 당신이 누군가를 진정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당신은 그 눈이 자신의 눈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 개인의 눈이 아니라 신의 눈임을 깨닫는다.
저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집을 나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돕을 구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일을 하며 집에 남아 있었던 아들보다도 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왜 그랬는가? "예수는 이것을, 다른 아들은 언제나 집에 있었지만 탕자는 잃어버렸으므로 아버지가 늘 그리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아버지는 탕자를 심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사랑했다. "거기에는 심판이 없었다. 오직 사랑밖에 없었다."
또 다른 예시가 있다. "또,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처음으로 한 말은 무엇이었는가?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나이다."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했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이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이다.
저자는 아름다운 비유를 제시한다. "당신의 신과의 관계는 태양과의 관계와도 같다. 몇 년 동안 태양을 외면했다가 어둠 속에서 나오기로 했더라도 태양은 당신이 떠난 적이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빛나고 있을 것이다."
태양은 우리가 외면한다고 빛나기를 멈추지 않는다. "당신은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머리를 들어 태양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복잡한 절차나 의식이 필요 없다. 그냥 고개를 들면 된다.
"당신이 신을 향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냥 그렇게 하면 된다." 신에게로 가는 것도 똑같다. 그냥 향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지 않고 거기에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끼어들게 한다면 그것은 단지 신성한 힘을 가로막는 당신의 에고일 뿐이다."
"당신은 신성을 막을 수 없다." 신성은 막을 수 없다. "신성의 본질은 빛이요. 사랑이요. 연민이요. 가호요. 베풂이기에. 그것은 태양과 같다." 신성의 본질은 사랑이고 빛이다. 그것은 태양처럼 언제나 빛난다.
저자는 희망찬 메시지를 전한다. "멋진 것은, 당신도 이 황홀경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사람만의 경험이 아니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이 환희를 경험하기 시작할 때 그것이 신의 본성을 이해하게 되는 때이다." 신을 아는 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환희를 경험함으로써 아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러면 어느 누구도 당신을 화나게 하거나 실망하게 하지 못한다. 어떤 것도 문제를 일으키지 못한다. 모든 것이 당신 앞에 펼쳐지는 창조계의 아름다운 춤사위로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춤으로 보인다.
"당신의 평상 상태는 점점 더 높이 고양될 것이다. 당신은 부끄러움 대신 사랑을 느낄 것이다." 기본 상태가 사랑이 된다. "자신이 한 말이나 행위 때문에 신을 향해 눈을 들기가 두렵기는커녕 당신은 신을 조건 없는 평온한 안식처로 알게 될 것이다." 신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안식처가 된다.
저자는 최종 메시지를 전한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라. 심판하는 신이라는 관념을 놓아 보내라. 당신의 신은 사랑 깊은 신이다. 사실은 사랑 자체가 곧 신이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밖에 못한다."
"당신의 신은 환희 속에 있으며, 당신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신은 이미 환희 속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리고 신이 환희 속에 있다면 그가 당신을 바라볼 때, 그는 과연 무엇을 볼까?"
답은 명확하다. 환희 속의 신이 우리를 볼 때, 그는 사랑밖에 보지 않는다. 심판이 아니라 사랑, 정죄가 아니라 환희를 본다. 이것이 진정한 신의 눈이고, 우리도 이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 이것이 사랑 가득한 신의 눈으로 보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