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딩크족으로부터
나는 '통상 적으로', '보편 적으로', '대부분이'라는 말에 알러지가 있다. 서른이 넘기 전에 시집을 가야하고, 여자라면 애를 낳을 생각으로 몸을 아껴써야한다는 말이 그 중에 속해있다.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고 말 하면 당연하게 듣는 말이 "부부는 애가 있어야 산다."는 말이다. 그 말을 다르게 생각해 보자. "애가 있으면 참고 사니까"라는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애가 있어야 산다는 말은 어떤 말일까?
아이한테는 엄마, 아빠가 필요하니까, 서로에 대한 애정은 식었지만 애를 봐서라도 참고 살게 된다는 것일까?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은 둘 사이에 공동의 과제가 주어지는 것과 같다. 아이가 말을 배우고, 배변을 가리고, 걷고, 뛰는 과정들이 부부에게는 과제가 될 것이다. 이 과제를 해 내기 위해 둘은 싸우기도 하고 공부도 하고 아이디어를 합쳐 과제를 이루어 낸다. 사랑하는 마음만 가지고 살아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고 권태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럴 때 아이가 있다면 둘의 삶에 새로운 이벤트가 마구 생겨날 것이다.
내가 이렇게 생각한 데는, '딩크족'들이 반려 동물을 입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우린 둘 만 있으면 돼!"라지만, 함께 양육을 책임지는 반려 동물이 있는 집도 있다. 그들은 아마 둘 사이에 공동으로 정성을 쏟을 수 있는 사건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사건이 이왕이면 어떤것이 '성장'하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일이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반려 식물을 키운다. 내가 반려 식물을 키우는 이유는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아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우리 동네 아기들을 다 업어키웠다. 낮잠도 재워주고, 밥도 먹여주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에 마음이 녹아 내렸다. 그런데 아기를 낳기에 나는 준비되지 않은 것 들이 많다. 지금의 내 여건이나 신체의 문제 등이 이유가 되어 아기를 낳아 기르는 것을 고려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반려 동물 입양하을 고려했는데, 귀엽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곁에 두고 제대로 챙겨주지 못할 시간들을 생각하니 존재하지도 않는 그들(?)에게 벌써부터 너무 미안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가 매일 곁에서 보살펴 주지 않아도 되지만 적당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살아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바로 식물이었다. 아보카도를 먹다가 씨앗을 심었는데 귀여운 뿌리가 자라있는게 너무 신났고 멜론을 먹고 나온 씨앗에서도 귀여운 새싹이 자라났다. 그들은 내가 매일같이 옆에 있어주지 않아도 적당히 물을 주고 햇볕과 바람을 쏘여주면 무럭무럭 잘 자랐다.
아마 이런 생각과 비슷하게 그들은 자식을 낳는 것 보다는 동물을 입양해서 가족 삼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봤다. 특히 부부에게는 '공동의 과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나는 혼자 반려 식물을 양육중이지만 두 사람이 함께 시간과 노력을 쏟아서 이루어낼 수 있는 공동의 과제가 있다면 더 큰 유대감으로 엮일 수 있을 것이다. 회사에서도 유독 힘들고 어려운 프로젝트를 함께 해 냈을 때 팀원들끼리 사이가 돈독해 지는 것 처럼, 부부 두 사람에게도 어렵고 힘든 '육아'라는 과제를 하나씩 해 내면서 쌓이는 유대감이 둘을 점점 강하게 연대하게 만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는 아이가 있어야 산다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그 과제는 두 사람에 의해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 뿐 아니라 동물이든 식물이든, 또는 다른 공동의 취미를 과제로 삼으며 살아가는 형태로 자유롭게 선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 있어 선택하는 모든 것은 내 삶이 평안하고 윤택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그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애가 있어야 산다."는 말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부부가 함께하는 일을 꼭 만드세요."
둘이 함께 하는 일이 한 가지 이상 존재한다면 그 일을 하는 과정과 끝에서 유대감과 성취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한테 결혼도 안해봐놓고 어떻게 아냐고 한다면 할말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