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여행의 특별하지 않은 순간들
‘쿠알라룸푸르 컨벤션 센터‘의 지하 아케이드에서
잠깐 쉬었다 가기로 했다. 그곳에 있는 푸드코트와
테이블은 꽤 북적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KLCC 공원‘으로 가기 위해 이 지하도로를 이용했고,
우리도 역시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를 보려고
지나가는 길이었다. 딱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은 아니었다. 분위기는 한국의 지하상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딱히 없었다.
하지만 쉬고 가지 않으면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쿠알라룸푸르에는 아무런 계획 없이 왔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몰라 랜드마크 몇 군데를 둘러보기로 했다.
랜드마크를 보는 일에 큰 관심은 없지만 가끔 유용할
때가 있다. 길을 잃었을 때 나침반을 대신한다든가
오늘처럼 뭘 해야 좋을지 모를 때 할 거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그런 명칭이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오전에는 그 유명한 ‘바투 동굴’을 봤고 오후에는
시내의 몇 군데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겨우 ‘바투 동굴’ 한 군데만 둘러보았을 뿐인데 녹초가
되어버렸다. 습하고 찌는 듯한 더위가 체력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렸다. 물론 뺏길 체력 자체가 많지
않은 우리의 문제도 있겠지만, 동남아를 여행하기
위해선 더위를 얼마나 잘 버텨내느냐가 관건이다.
여행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걷기’라 믿고 무작정
걸으려 했던 나는 이곳의 날씨에 그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현은 테이블에 엎드려 30분 정도 잤다. 막 잠에서
깬 다현의 얼굴은 멍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재빨리
밝은 표정을 되찾길 바랐지만 그 표정은 한동안 쉽게
변하지 않았다. 초점이 흐린 눈은 밖이 아닌 안을
향해 있는 듯했다. ‘괜찮을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그 생각이 어쩐지 다현의 머릿속에도 떠올랐을 것
같았다. 물론 의미는 조금 달랐겠지만.
우리는 여행을 하는 중이지만 동시에 일상을 보내는
것이기도 하다. 긴 여행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라
일상이 아닌 시간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속도에 맞춰 움직임과 쉼의 균형을 잘 찾아가보자고 이야기했다.
모든 여행의 순간들이 <비포 선라이즈> 속 셀린과
제시의 그것처럼 낭만적일 수는 없다. 때로는 상대방의
불쾌한 감정에 하루 종일 눈치를 살펴야 할 수도 있고,
먼지와 매연이 흩날리는 길가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서
쉬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얼마 후 기력을 조금 회복한 우리는 늦게까지 꽤 많은
곳을 걸어 다녔다. 다음 날, 다현은 몸살을 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