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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르는 마음 Jul 31. 2023

일단 다녀오겠습니다

책상 위에 놓아둔 일력에 포스트잇을 붙여둔 날까지 열 장 남짓 남았다. 남은 열 장을 다 떼고 나면, 다현과 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은 채 발리를 향해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우리는 일 년 정도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예정이다.


우리가 갓 만나기 시작했을 무렵, 버스 안에서 다현이 물었다. 혹시 살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냐고. 나는 딱히 그런 건 없지만 세계여행은 한 번쯤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그녀도 잠깐 생각하더니 “와, 저도 그런데. 우리 같이 다니면 재밌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왜 세계여행인지는 묻지 않았다. 세계여행만큼 막연하면서도 무언가 특별할 것 같은, 말하자면 꿈같은 일에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그것도 이제 막 사랑을 틔우기 시작한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그리고 있는데. 우리는 막연하기만 한 그 일을 구체화하기 위해 지난 오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출발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으레 그렇듯 설렘과 가벼운 불안이 찾아왔다. 동시에 그동안 미처 생각지 못한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 세계여행일까?’ 막상 많은 비용과 시간을 써야 할 때가 되니 걱정이 되었던 걸까. 서둘러 이유를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이 일을 위해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만큼 얻게 될 것이 있을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과연 그만큼의 비용과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일일까? 그 말만으로 충분한 것일까? 우리는 여태 세계여행을 떠나는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다현에게 물었더니 “그걸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준비를 하면서 여행 유튜브를 많이 찾아봤다. 처음에는 낯설고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그들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세계여행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별 일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구글에서 맛집과 볼거리들을 찾았다. 구글맵에서 정확한 경로를 찾아내어 길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 음식이 정말 맛있는지, 그 풍경이 정말 아름다운지 그저 ‘확인’ 하기 위해 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그려왔던 여행이 저 정도라면, 어쩌면 떠날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다현의 말이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무리 생각한다고 한들 찾을 수 있는 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밖에 알 수 없었다. 여행에 관한 영상들을 많이 봤다고 해서 그들의 경험과 나의 경험이 같을 수는 없다. 비록 별 볼 일 없는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홍상수의 <하하하>에서 성옥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문경은 “몰라야 더 보이는데”라고 했다. 잘 알지 못하는 나는 후자 쪽이 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여행은 저울질을 해서 더 나은 쪽을 선택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리에 이끌려 그것을 쫓아가는 일과 닮아있다. 잘 몰라서, 우리는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잘 모르니까 알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길의 끝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하더라도 길 위에서 만난 풍경들이 위로가 되어 주겠지. 그러니까 일단 다녀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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