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1959년 7월 31일
진보당 사건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2』마흔네 번째 장면

by 박재한
1959.07.31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사형 [위키 커먼즈, 퍼블릭 도메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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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 퍼블릭 도메인>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초대와 2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 대통령이 후보로 나왔고, 러닝메이트로 이기붕이 부통령 후보로 나왔다. 반면 사사오입 개헌으로 위기감을 느낀 야권 정당과 정치인들은 민주당이라는 자유당 대항 정당을 만들어 후보를 내세웠다. 대통령 후보로는 신익희 후보, 부통령 후보로 장면 후보가 나섰다. 한편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조봉암이다.


조봉암은 이미 국민들에게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농지개혁을 추진하던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로 초대 농림부장관에 임명되어 농지개혁을 과감하게 진행하였다. 농지개혁을 통해 소작인과 지주와의 대립을 어느 정도 완화했다는 평과 북한에 농지개혁과 비교했을 때 아쉬울지라도 북한으로 넘어가려는 마음이 들지 않게는 만들었다는 평도 있다. (농지개혁은 토지 소유권을 경작자에게 이양해 농촌 민주화·농업경영 합리화를 꾀한 정책이다. 남한은 1949년 6월 21일 「농지개혁법」을 공포하고 1950년부터 유상매수·유상분배 방식으로 시행했다. 광복 당시 전농지 222만 6천 ha 중 소작지가 65%(144만 7천 ha)였고, 귀속농지 29만 1천 ha와 한국인지주 농지 32만 2천 ha 등 총 61만 3천 ha가 91만 8,548호에 분배됐다. 소작 갈등을 줄여 ‘성공적’ 평가도 있으나, 지가증권 보상 효과의 불확실성과 사후관리 미비로 1997년 임차지가 43.5%(83만 7천 ha)로 재확대됐다. <농지개혁,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3대 대선 후보 경선 중 민주당 식익희 후보가 선거유세를 위한 이동 중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사망한다. 후보는 이승만과 조봉암만 남은 상황, 자연스레 신익희를 지지했던 민주당 지지자가 조봉암으로 갈 수도 있었는데 민주당에서 조봉암을 지지할바에는 신익희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무효표를 던지라고 홍보를 하는 등 선거는 대단히 이상한 양상을 벌어지게 된다. 결과는 기호 1번 조봉암 후보가 30.01%(210만여 표), 기호 3번 이승만 후보가 69.99%(500만여 표)를 받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3선 연임이 성공하게 된다. 조봉암 후보는 선거 결과를 보고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을 하며 깊은 탄식을 했다.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그건 부통령 선거에서 어느 정도 갈피를 잡을 수 있다. 부통령 선거 결과 민주당 장면 후보가 자유당 이기붕 후보를 이겼기 때문이다. (장면은 46.42%, 이기붕은 44.03%를 득표했다.) 또한 부정선거 논란도 있었다. 경인일보에서 전 강화문화원 이사 조석묵씨를 인터뷰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란에 2만 표를 바꿔치기했다고 이실직고를 한 것이다. (2011.01.27, 경인일보, "조봉암후보 득표용지... 무더기 바꿔치기 했다.")


이후 조봉암은 진보당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본격적인 이승만과 대적하는 정치를 하게 되는데, 이승만 정권은 이를 아주 안 좋게 보고 있었다. 결국 1958년 1월 9일 “김달호, 박기출, 조규희, 이동화 등이 사회주의제도로 개혁하고 정부를 변란 할 목적 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북한 괴뢰집단과의 협상으로 무력재침의 선전구호인 평화통일공작에 호응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라고 서울시 경찰국이 발표하였고, 1958년 1월 12일 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한다. 한 달이 지나 검찰은 1958년 2월 16일 기소하였다. 재판은 아주 빠르게 진행됐다. 1958년 3월 13일 공판이 시작되었고, 4개월이 지난 7월 2일 선고 공판이 이루어지게 된다. 1심 결과로 조봉암은 징역 5년 그 외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는데 검찰은 이에 바로 항소를 진행하게 된다. 2심은 딱 1달 동안 진행되었고, 10월 25일에 마무리된다. 2심 재판부는 조봉암에 대한 간첩죄 혐의에 원심을 파괴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이에 조봉암은 상고를 하며 조봉암 사건은 대법원으로 이동하게 된다. 대법원은 1959년 2월 27일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그러나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2심을 파기하고 1심과 동일한 무죄를 선고했다. 조봉암은 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였으나 1959년 7월 30일 기각하였고,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다. 법원에서의 판결이 난 하루 뒤인 31일에 사형이 바로 집행이 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이 자신의 라이벌이 될까 두려워 결국 조봉암을 사법살인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2011년 1월 20일 조봉암 사건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렸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먹구름이 짖게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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