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2』마흔다섯 번째 장면

by 박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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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퍼블릭 도메인>

1960.04.20 4.19 혁명, 독재에 항의하는 시민들 한국정책방송원, 공공누리 1유형.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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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한국정책방송원 공공누리 1 유형>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임기 제한이 없는 초유의 헌법이 개정된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당연히 4대 대선에도 출마를 선언했다. 야당에서는 민주당 조병옥 후보로 의견이 모아져 단일대오로 이승만을 무너뜨리기 위한 대선에 돌입했다. 한편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 선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나이가 고령으로 접어들었기에 비상상황에서는 부통령이 대통령의 임기를 대신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야당에서는 김준연, 임영신, 장면 등의 후보가 나왔으나 대체적으로 장면의 인기가 좋았다. 자유당은 걱정했다. 이미 3대 대선에 여차저차하여 이승만을 당선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부통령으로는 민주당의 장면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는 같이 열렸다. 러닝메이트로 출마를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결국 그들은 희대의 부정선거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때 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조병옥이 갑작스레 사망했다. 대선 중에 사망한 신익희 선생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로서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상의 찬반투표로 진행되었다.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 당선으로 끝났다고 판단한 자유당과 정부는 시선을 부통령 선거로 돌리게 된다.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자유당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의 선거전에서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을 전폭적으로 밀어줬다. 야당의 선거원들을 체포하고 탄압했다. 또한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이 투표권 행사를 감시하기 위해 투표장에 등장했다. 농촌지역에서는 3인조 등의 조를 편성하여 투표를 진행했다. 이렇게 부정선거를 저질러도 부족하다고 판단한 그들은 개표에서도 바꿔치기를 하는 등의 부정 개입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 후보는 960만 표를 받으며 100%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부통령 선거는 이기붕 후보가 830만 표(79.19%), 장면 후보가 184만 표(17.51%)를 득표하며 이기붕 후보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당선자를 알리자 전국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게 된다.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였고 맹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특히 마산(현 창원특례시)의 시위가 거세게 이어졌다. 문제는 다음에 일어난다. 마산에서 발생한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한 김주열 학생이 실종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3주가 지난 뒤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머리에는 최루탄이 박혀있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하였다. 정부는 이를 공산주의 세력이 조종한 폭동이라고 단순 치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거세졌다. 전국의 시민들은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촉구했다. 시위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여당 측의 조직이었던 반공청년단과 자유당 간부의 집을 파괴했다. 또한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시위대를 향하여 강경 진압을 했다.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그러다 4월 25일, 대학 교수 300여 명이 이승만의 사임을 촉구하는 시위에 가담하였다. 4월 26일에는 남산에 위치했던 이승만 동상이 시민들의 손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이승만 동상이 부서진 모습은 그대로 신문을 탔고, 시민들의 손에 의해 독재가 무너져 내린다는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다. 그렇게 결국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정치 인생이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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