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2』마흔여덟 번째 장면

by 박재한
1963.12.17 박정희 대통령 취임 [위키 커먼즈, 퍼블릭 도메인] 1963.12.17-1979.10.26 케네디 대통령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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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과 케네디 대통령, 퍼블릭 도메인 당시 사진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신분이었다.>


1962년 12월 17일, 제1차 국민투표를 통해 5차 개헌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의원내각제였던 대한민국의 권력 배분은 대통령 중심제로 다시금 복귀되었다.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겠다는 기존의 목표가 달성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국군 예편을 함과 동시에 민간인 신분으로 전환하고 제5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정국은 군부 세력인 박정희와 민주공화당과 제1,2 공화국을 주도했던 야당의 싸움으로 개편되었다.


여러 후보가 대선에 출마했지만 박정희를 견제하기 위해 하나로 뭉치게 된다. 그리하여 대선의 구도는 박정희와 윤보선의 대결로 이어지게 된다. 민정당의 대선후보였던 윤보선은 박정희의 남로당(남조선노동당)의 경력을 강조하며 사상검증의 대상으로 박정희를 올렸다. 박정희는 자신이 확실히 전향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여기서 윤보선 후보 측의 실수가 나온다. 꾸준히 사회주의와 좌익 세력을 공격하고 비난했던 윤보선 후보 측의 발언들로 좌익세력의 비토를 쌓고 있었다. 그러던 1963년 10월 10일 윤보선 후보 운동원 중 한 명이었던 김사만이 영주 선거 유세에서 "부산과 대구는 빨갱이가 많은 곳", "김일성을 보면 만세 부를 사람이 많다"라고 실언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발언이었지만 해방 이전부터도 대구는 동방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았었다. 이 발언으로 윤보선 후보는 크게 흔들렸다. 대선 후에 김사만을 제명시킨 것을 보면 당에서도 선거 패배의 요인으로 판단한 듯하다.


1963년 10월 15일, 1100만 명(84.99%)이 투표한 결과 박정희 후보가 4,702,640표(46.64%), 윤보선 후보가 4,546,614, 표(45.09%)를 득표하며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표차이는 불과 15만 표(1.55% 차이)였다.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만든 지역 중아 하나는 전라도와 경상도 농촌 지역이었다. 전라남도에서는 57.22%, 전라북도에서는 49.43%, 경상북도 55.64%, 경상남도 61.71%, 제주도 69.88%를 득표하며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을 이긴 윤보선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지금 정치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민주적 절차로 당선되지 못했다는 기존의 족쇄를 벗어던진 박정희 대통령은 한 달 뒤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민주공화당의 대승(110석, 62.9%)으로 입법부와 행정부를 모두 장악한 권력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는 쿠데타를 합리화하고 국민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경제발전이라는 하나의 기치에 매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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