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2』쉰 세 번째 장면

by 박재한
1973.08.08 김대중 납치 사건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1유형.jpg

<김대중 납치 사건, 한국학중앙연구원 공공누리 1 유형>


유신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영구집권이 가시권에 들어온 박정희 대통령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한 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도쿄의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갑작스레 납치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에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실 이미 김대중 후보에게는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이 연속해서 발생했었다. 1971년에는 동교동에 위치한 자탁에서 갑자기 폭발물이 발생하는 사건이 있었고, 같은 해 선거 유세 도중 14톤 트럭이 김대중이 타고 있는 차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사고로 인하여 김대중은 고관절이 골절당하는 피해를 입었고,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던 와중 한국에서 유신이 터진 것이다.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택한 김대중은 일본에서도 박정희의 독재를 향하여 맞서 싸웠다. 그러던 와중 1973년 8월 8일 갑작스레 납치를 당한 것이다. 몸이 묶인 채로 바다에 빠지기 직전 해상자위대 함정이 김대중이 타고 있는 배를 향해 추격해 왔고, 사건이 발각될 위험이 처하자 김대중을 빠트릴 계획을 바꾸고 김대중의 집이었던 동교동 근처에 풀어주게 된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에 수사에 나섰다. 아무래도 자국에서 일어난 납치 및 살인 미수 사건이었기에, 김대중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민주주의자에게 닥친 사건이었기에 빠르게 수사에 나선 것 같다. 수사 결과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사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203)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공공누리 1 유형>


[박정희 친서]

다나까 가꾸에이 日 총리에게


각하, 본인은 각하의 탁월하신 영도하에 일본 국민이 일익 번영과 행복을 누리고 있음에 대하여 경의와 경하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한일 양국은 가장 가까운 인방으로서 과거의 모든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롭고 꾸준한 노력으로 양국 국민 사이의 우의가 돈독해지고 양국 정부간에서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상호 유익한 협력관계가 날로 증진되고 있음은 매우 기쁜 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의외에도 김대중 사건이 야기되어 일시적이나마 양국 사이에 물의가 생긴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며 본인은 각하와 귀 국민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양국간의 기본적이고도 전통적인 선린우호관계에 어떠한 균열도 초래되어서는 안될 줄 생각합니다. 또 양국 간에서 다시는 유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상호 신뢰와 우호를 증진하는데 더욱 기여하고자 합니다. 한일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에 비추어 본인은 김종필 국무총리를 파견하여 한일 양국의 관계 증진을 위한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기회로 한국과 일본 양국간의 선린 우호 협력관계가 우리 양국의 공동 노력으로 일층 발전되어 나갈 것을 바라는 바입니다. 각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다나까 수상 친서]

김대중씨 사건으로 일한 양국간의 우호관계에 한때 분규가 발생된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었읍니다. 일본정부로서는 이 사건에 이치에 맞고 내외의 납득을 받을 수 있는 해결을 희구하여 왔음은 승찰 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금번 한국측이 소요되는 제 조치를 취하신 외에 특히 김 국무총리를 아국에 파견하시어 대통령 스스로의 유감의 뜻을 친서로써 우호관계 증진에의 기대를 말씀하시어 오신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로써 본 사건은 외교적인 결착을 짓고, 일한관계에 공정하고도 순조로운 발전이라는 양국민 공통의 염원이 달성되는 것을 절실히 기원합니다.

이전 26화52.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과 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