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2』쉰 다섯 번째 장면
<부마 항쟁, 퍼블릭 도메인>
유신헌법을 통한 민주주의 파괴와 인권유린은 많은 파열음과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첫째로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와 큰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6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방한은 그야말로 한미관계의 극악을 보여주는 회담이었다. 카터와 박정희는 회담 내내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하여 맹렬히 언쟁하였다.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를, 박정희는 철수 반대라는 주장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또한 카터는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인권 문제를 언급하며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라고 압박하였다.
1975년 5월 13일에 「대통령긴급조치」제9호(국가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긴급조치)가 제정되었고,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전파하는 행위,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학교당국의 지도, 감독하에 행하는 수업, 연구 또는 학교장의 사전 허가를 받았거나 기타 의례적 비정치적 활동을 제외한, 학생의 집회·시위 또는 정치, 관여행위, 이 조치를 공연히 비방하는 행위, 위에 위반한 내용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하거나, 그 내용의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소지 또는 전시하는 행위를 금하고, 재산을 도피시킬 목적으로, 대한민국 또는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을 국외에 이동하거나 국내에 반입될 재산을 국외에 은익 또는 처분하는 행위를 금하고, 관계서류의 허위기재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해외이주의 허가를 받거나 국외에 도피하는 행위를 금하였다.
주무부장관은 이 조치위반자·범행당시의 그 소속 학교, 단체나 사업체 또는 그 대표자나 장에 대하여 대표자나 장에 대한 소속임직원·교직원 또는 학생의 해임이나 제적의 명령, 대표자나 장·소속 임직원·교직원이나 학생의 해임 또는 제적의 조치, 방송·보도·제작·판매 또는 배포의 금지조치, 휴업·휴교·정간·폐간·해산 또는 폐쇄의 조치, 승인·등록·인가·허가 또는 면허의 취소조치의 명령이나 조치를 할 수 있다.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직무상 행한 발언은 이 조치에 저촉되더라도 처벌하지 아니하며, 다만, 그 발언을 방송·보도 기타의 방법으로 공연히 전파한 자는 그러하지 아니하고,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며, 이 경우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 하고,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또는 음모한 자도 또한 같다. 이 조치 또는 이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고, 이 조치 시행 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2조(뇌물죄의 가중처벌)의 죄를 범한 공무원이나 정부관리기업체의 간부직원 또는 동법 제5조(국고손실)의 죄를 범한 회계관계직원 등에 대하여는, 동법 각조에 정한 형에, 수뇌액 또는 국고손실액의 10배에 해당하는 벌금을 병과 하며, 이 조치위반의 죄는 일반법원에서 심판한다.
이 조치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은 주무부장관이 정하고, 국방부장관은 서울특별시장·부산시장 또는 도지사로부터 치안질서 유지를 위한 병력출동의 요청을 받은 때에는 이에 응하여 지원할 수 있으며, 이 조치에 의한 주무부장관의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이 조치는 1975년 5월 13일 15시부터 시행되었다.
《법무부사》법무부, 1988, 공공누리 1 유형
이 와중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뉴욕 타임스의 인터뷰가 세상에 공개되었는데, 이 기사가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낳았다. 서울(대한민국) 9월 15일 —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거침없는 반대 발언 때문에 체포 직전의 상황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곳 의회 야당 지도자가, 카터 행정부에 박정희 대통령의 “소수 독재 정권”에 대한 지지를 끝낼 것을 촉구한 것이다. (SEOUL, South Korea, Sept. 15 — Believed to be on the verge of arrest because of his outspoken opposition to the South Korean Government, the leader of the parliamentary opposition here has called)
이미 제10대 총선에서 제1야당인 신민당이 민주공화당보다 득표를 많이 받는 현상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박정희 정부는 카터 행정부 출범과 한미관계 악화 등으로 끊임없는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정부는 격노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꼈다. (참고로 신민당이 민주공화당보다 많이 득표를 했더라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따로 77석의 유신정우회 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에 입법부와 관련해서는 큰 문제는 없었다.) 박정희 정부의 든든한 우군인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들은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는 조치에 이른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제명 조치로 인하여 의원직을 박탈당한 김영삼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을 남기며 민주주의 투쟁의 길을 이어갔다.
한편 부산과 마산 지역은 김영삼 제명 조치로 인하여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김영삼 의원이 PK(부산, 경남 일대)가 연고여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부마민주항쟁은 유신독재에 정면으로 맞선 범시민적 민주화 운동이다. 초기 학생 중심이었던 시위는 이튿날부터 노동자, 상인, 화이트칼라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대거 합세하며 5만 명 규모의 시민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18일에는 마산 지역으로 확산되어 더욱 격렬한 양상을 띠었다. 시민들은 유신 체제의 상징인 민주공화당 당사와 파출소뿐만 아니라 언론사와 세무서를 공격하며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생존권을 동시에 요구하였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부산에 비상계엄을,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다. 이 사건은 정권 내부의 갈등을 촉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결국 부마민주항쟁 발생 직후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격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며, 강고했던 유신 체제는 이렇게 끝나게 된다. (10.26 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