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1987년 6월 10일
6월 민주항쟁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3』육십 번째 장면

by 박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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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7.09 6월 민주항쟁 (공공누리 1유형) 고_이한열_추모_군중 6월_민주_항쟁_보행로_독재_규탄_문구.jpg

<6월 민주항쟁, 공공누리 1 유형, 이한열 추모 군중 / 6월 민주 항쟁 보행로 독재 규탄 문구, 공공누리 1 유형>


전두환과 신군부가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는 1981년 1월 29일 11대 총선을 대비한 국회의원 선거법을 공포했다. 개정된 선거법은 지역구마다 다수 득표제로 2명씩 선출하고 지역구 의원 정수의 50%는 전국구로 선출되는 것으로 개편했다. 또한 전국구 의석의 배분을 놓고 보았을 때는 지역구 선거에서 제1당에게 2/3을 우선 배분하기로 하기로 하는 등 여당이 이길수 밖에 없는 구도를 만들어 놓고 선거를 치렀다. 실제로 결과는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과반을 넘는 151석을 점유하였고,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이 81명을 점유하며 사실상 전두환 입맛대로 의회를 주무루는 구도를 만들어냈다.


이후 3S 정책, 국풍 81 등의 우민화 정책으로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고 하였으나, 정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여전히 높았다. 이를 두려워한 전두환은 김영삼과 김대중 등의 유력 야당 인사들의 정치 활동을 방해하고 금지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일부 야당 인사들의 정치 활동 금지가 해소되자 야당 인사들은 반여당 빅텐트 정당을 꾸리게 되니 이 정당이 바로 신한민주당이다. 참고로 전두환은 신한민주당이 과거 신민당이라는 약칭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다분히 노력했다. 또한 선거를 1-2달 앞당겨 2월 12일 총선을 치르기로 결정하면서 1월에 막 창당한 신한민주당이 선거에서 이길 수 없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전두환에 분노한 민심을 그대로 표출했다. 선거 결과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87석을 획득한 반면에 급하게 만들어진 신한민주당은 50석을 획득하며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전체 지역구의 52.7%인 97명이 야당 출신이 되었다는 점에서 민주정의당과 전두환은 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100석에 육박하는 의석을 획득한 야당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목소리와 합쳐져 거대한 민주화의 물결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와 개헌을 하기 위한 물결이 만들어지던 와중 1987년 4월 13일, 이른바 4.13 호헌조치라고 하는 발언을 전두환이 하게 된다. 4.13 호헌조치의 핵심 골자는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것이다.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하겠다는 전두환의 단호한 연설은 민주화 세력의 폭발을 불러일으켰고,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하고 6월 10일 대규모 시위를 기획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고, 이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지게 된다. 결국 시민들은 폭발하였고 거리에 대략 400-500만 명의 시민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민주화를 부르짖었다. 정부는 최루탄 67만 발을 쏘며 시위를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최루탄은 더 이상 시위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전국의 모든 시민들이 들고 나와 민주화를 요구하게 되자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수용하는 6.29 민주화선언을 함으로써 이른바 '6월 민주항쟁'의 역사가 승리로 끝나게 된다.


[6월 항쟁,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987년 유월항쟁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라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이 항쟁에 동참한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제시한 ‘호헌철폐 독재타도’, ‘직선제 개헌’이라는 슬로건으로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유월항쟁은 이러한 민주화 세력의 통합성, 즉 각기 다른 성격과 지향을 가진 여러 주체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최소 강령’하에 ‘최대 연합’으로 결집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실질적 의미의 ‘시민사회’가 형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통합성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계급 문제 등에서 많은 갈등과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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