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3』육십 한 번째 장면
<노태우와 조지 하워드 부시 대통령, 퍼블릭 도메인, 이 사진은 1991년 사진이다.>
6월 민주항쟁으로 극적인 대통령 직선제를 맞이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 체제 이후로 약 15년 만의 일이다. 국민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드디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으로서 당당히 선거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통령을 꿈꿔온 민주화 세력의 지도자들이 대통령 출마를 공식화했다. 평화민주당으로는 김대중 후보가 출마하였고, 통일민주당으로는 김영삼 후보가 출마했다. 전두환과 함께 신군부를 이끌었던 노태우 또한 민주정의당 후보로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였고,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였던 김종필도 신민주공화당의 대선후보로 출마했다. 구군부의 대표주자, 신군부의 대표주자, 민주화 세력의 대표주자들이 출마하며 제13대 대선이 불타올랐다. 자연스레 국민들의 관심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단일화 여부였다. 아무리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노태우나 김종필이 대통령이 되었다가는 합법적으로 군부세력의 정권 연장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단일화가 쉽게 이루어지는 듯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상황은 오묘한 양상을 보였다. 단일화 진행은 지지부진했다. 그렇게 단일화는 물 건너갔고, 선거는 4명의 주요 후보로 끝까지 가게 된다.
이때 묘한 상황이 벌어진다. 4명의 각 후보가 각자의 표심을 확고히 하기 위해 지역구도를 강조한 것이다. 노태우는 고향 경상북도 달성군임을 강조하며 대구, 경북(TK)의 유권자 표심을 자극하였다. 이에 질세라 김영삼은 고향인 경상남도 통영을 강조하며 부산과 경상남도(PK)의 표심을 강조했다. 김대중은 당시 전라남도 무안군(현재는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임을 강조하며 전라도의 표심을 자극했고, 김종필은 자신의 고향은 충청도 표심을 자극했다.
선거 결과는 향후 대한민국 정치판의 많은 의미를 남겼다. 신군부 세력의 대표주자였던 노태우 후보가 약 828만 표(36.64%)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약 633만 표(28.03%), 김대중 후보는 약 611만 표(27.04%), 김종필 후보는 약 182만 표(8.06%)를 받으며 낙선했다. 민주화 세력의 단일화 실패로 군부 세력이 합법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그동안 대통령 직선제를 부르짖었던 시민들은 절망했다. 반면 민주정의당과 전두환, 노태우는 축배를 들며 승리를 자축했다. 역사의 오묘함이 연장되는 순간이었다.
참고로 주목해야 할 결과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지역별 투표 결과이다. 노태우 후보는 자신의 고향 지역은 경상북도, 대구와 경기, 강원, 충북에서 승리했다. 특히나 고향 지역인 경상북도는 66%, 약 110만 명이 노태우를 지지했고, 대구 또한 80만 표로 약 70%가 노태우를 지지했다. 다른 후보들도 비슷한 결과표를 받았다. 김영삼 후보는 부산에서 약 111만 표(55%), 경남 지역에서도 98만 표(51%)를 받았다. 김대중 후보 또한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광주에서 약 94만 표(83%), 131만 표(90%), 44만 표(94%)를 받았고, 전체 4등을 했던 김종필 마저 자신의 고향인 충청남도에서 69만 표(45%)를 받으며 충청남도에서는 1등을 했다. 이렇게 노골적인 지역구도를 선거에서 펼친 결과 지역별로 완전히 상이한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선거의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한국 정치가 해결하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