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2002년 5월 31일
한일월드컵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3』육십 여섯 번째 장면

by 박재한

<한일 월드컵, 퍼블릭 도메인>


2002년 5월 31일부터 6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에서는 아시아 최초의 FIFA 월드컵이자, 2000년대에 개최되는 최초의 월드컵인 한일월드컵을 개최했다. 그동안 한국은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 운동과 더불어 IMF 외환 상환을 위해 정부, 국민 가릴 것 없는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마 가장 놀랄만한 결정은 김대중 정부의 IMF 요구 전면수용일 것이다. IMF 위탁체제로 들어선 이후 빠르게 반등한 대한민국 경제는 2년 뒤인 2000년에는 상당한 수준으로 경제를 회복하였다. 또한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전 세계에서 놀랍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실제로 350만 명이 참여하고 227톤이 모인 금 모으기 운동은 국가를 살리기 위해 개인의 자산을 기꺼이 기부하며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추상적인 문구를 육체적이고 시각적으로 느끼게 해 준 상징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2000년이 들어선 이후 외화보유고가 800억 달러에 이르며 급한 불은 껐다고 볼 수 있다. (외환위기 당시 39억 달러 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대단히 빠르게 많이 모은 수치이다.) 또한 김대중 정부(또는 국민의 정부라고 불린다.)는 포스코, 한국담배인삼공사 등의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대기업 구조조정, 사이버 코리아 21 정책을 시행하며 외환위기 극복을 이루어냈다. (사이버 코리아 21이란 4년간 28조 원을 투자하여 인터넷과 IT 산업을 육성하고자 했던 정부정책이다. 이 정책으로 한국은 인터넷 초고속망 구축 세계 1위를 2001년에 달성하였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정리해고로 인한 실업장 상승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로 인한 국민 개개인의 고통 분담도 주목하며 기억해야 한다.


여하를 막론하고 한국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은 이후 2001년 8월 195억 달러에 이르는 금액을 조기상환함으로써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새천년에 돌입하게 되었다. 어떤 국가나 국책기관에서도 한국의 조기상환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국민의 저력으로 위기를 극복한 한국이었다. 그리고 2002년 5월 31일 한일월드컵이 개막했다. 불과 14년 전인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이 전쟁을 극복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린 축제였다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외환위기를 극복한 선진국 수준에 준하는 국가의 위상을 보여준 축제가 된 것이다. 실제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히딩크 감독 체제로 박지성, 안정환, 이을용, 이천수 등 수많은 축구선수(태극전사라고도 불렸다.)와 함께 월드컵 4강 신화를 기록하였다. 개최국이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전으로 한국은 많은 월드컵 개최 효과를 얻었다. 실제로 2003년 7월 1일에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에서 발간한 2002년 경제백서에 따르면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인하여 부가가치 유발, 국가 브랜드 홍보, 기업 이미지 제고 등으로 총 26조 4천억 원 정도의 경제적 효과를 만들었으며, 2002년 경제성장률 7.7%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물론 경제효과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과 긍부정 평가가 공존한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으로 전 국민이 대동단결하여 한국 대표팀을 응원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한일월드컵에서 7차례 길거리 응원이 열렸는데 이 응원에 참여한 인원이 전 국민의 47% 정도인 2,193만 명이라고 하니 당시의 월드컵의 인기와 열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한일 월드컵 한국전 시청률은 각 경기마다 70%를 넘어갔다고 한다.)


+)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2 연평해전이다. 우선 제1 연평해전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한다. 제1 연평해전은 1999년 6월 15일에 발생했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연평도와 백령도 일대의 해안이다. 해상 군사분계선 기준으로 한국은 서해 5도를 수호하고 그 일대의 영해(북방한계선)를 수호하고 있었다. 그러다 1999년 6월 7일부터 14일 사이부터 북한 경비정이 한국 영해를 침범하는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하다 15일이 되자 북한 경비정 7척이 대한민국 해군 소속 고속정에 충돌 및 공격을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해군은 즉각적으로 즉각 대응사격을 하였고 북한군 어뢰정 1척을 격침하고 5척을 파손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시간이 조금 지난 2002년 6월 29일, 2002년 한일월드컵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 북한은 또다시 북방한계선을 침범하였다. 대한민국 해군 소속 참수리 357호가 집중적으로 공격당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은 참수리 357호와 358호가 대응사격을 시작하였고, 제천함과 진해함, 참수리급 경비정 4척을 투입하여 격파사격을 하였다. 30여분 진행된 전투 이후 북한군은 또다시 퇴각하며 전투가 종결되었다. 이 제1 연평해전과 제2 연평해전으로 대한민국 해군 소속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 상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이 전사했다. 전 세계의 축제가 열리는 곳을 향한 북한군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6명의 대한민국 해군이 전사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이 해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또한 국가를 위해 헌신한 전사자를 향한 대우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향상해야 할 것이다.

이전 10화65.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