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장군, 하얼빈의거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열여덟 번째 장면

by 박재한
1909.10.26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사진은 뤼순감옥에서의 재판) 퍼블릭 도메인.jpg

<1909.10.26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사진은 뤼순감옥에서의 재판), 퍼블릭 도메인>


1909년 7월 6일 일본 제국에서는 <대한정책의 기본방침>이라는 정책이 확정되었다. <대한정책의 기본방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적당한 시기에 한국병합을 단행할 것 2. 병합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병합의 방침에 기초해 충분히 보호의 실권을 장악할 것이었다. 이와 함께 병합의 시기까지 보호의 실권을 충분히 장악하기 위한 실행지침으로 <대한시설대강>을 통과시켰다. (시민의 한국사 90p. 中) 일본의 한국 병합 의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의병은 전국 각지에서 맹렬히 일어났다. 특히나 호남 지방에서의 의병 활동이 맹렬했는데 일본 제국은 '남한폭도대토벌작전 (일명 남한대토벌작전)'을 시행하게 된다. 9월부터 10월까지 이루어진 토벌 작전에 1,000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기록된다. (시민의 한국사 90p. 中)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직에서 사임하였는데 (1909년 3월 경), 의병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토는 한국 병합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고 판단하고 러시아의 대표를 만나 한국 병합의 지지와 미국에 대한 공동 대응을 논하기 위해 만주로 이동한다. 그러나 역사의 전환점은 이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이미 이토를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를 겨냥하여 총을 발사하였고, 이토는 숨을 거두게 된다.


안중근이라는 위인에 대해 의사인가 장군 인가 하는 표현에 대한 의논이 있다. 독립운동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의사라는 표현도 맞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가 재판정에서 자신의 소속을 대한의군참모중장이라고 밝혔기에 장군이라고 보는 측면도 존재하며, 대한민국 국군의 핵심 표어인 위국헌신 군인본분은 아직도 현재의 군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기에 장군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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