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2』서른네 번 번째 장면
<미소공동위원회, 퍼블릭 도메인과 AI 채색화>
한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20일에 개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설립될 당시에 한반도는 이미 미국과 소련이 38도를 기준으로 양분한 상황이었다. 독일은 패전국이자 전범국으로서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전범국도 아니고 오히려 우리는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인한 피해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분단되었다. 항간에 의하면 38도선을 기준으로 미국과 소련이 나누어 갖게 된 배경에는 미군이 세로로 긴 한반도를 자를 때 어디로 자를지 고민하다 39도선은 소련이 반발할 것 같고, 37도선은 너무 미국 쪽 영토가 적은 것 같아서 38도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닐 정도이니 참으로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 선 하나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경선이 되었고, 20대의 젊은 청년들이 총을 들고 경계를 서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곳에 배치된 위험한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 20일 서울 덕수궁 석조전에서 개최되었다. 해당 사진은 석조전 앞에서 찍은 모습으로 추정된다. 위원회가 출범하기는 하였지만 합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소련 측에서 제시한 한국 내 협의대상자 기준에 대하여 미국 측에서는 한국인이 대부분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기 때문에 이들을 제외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맞섰다. 이후로 제시된 여러 안들에 대해서도 양측이 서로 맞서며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결국 5월 6일을 기점으로 무기한 휴회를 하게 된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이렇게 끝이 나자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정읍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 발언을 기점으로 전에는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남한 단독정부 방안이 급부상하며 공론화가 되기 시작했다. 후술 하겠지만 미소공동위원회는 이후에도 회의를 몇 번 지속하다 결국 아무것도 합의하지 못한 채 위원회가 끝나게 되었고, 미국은 한국의 신탁통치를 포기함과 동시에 유엔으로 이 모든 문제를 이관시켰다. 유엔은 남북한 동시 총선을 치르고 초대 제헌국회를 구성한 이후에 대통령을 선출하고 정부를 출범시키려고 하였으나, 북한 측의 반발로 남한 단독 선거가 결정되었고 결국 남북한은 100여 년에 육박하는 분단의 상황을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