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2』서른다섯 번 번째 장면

by 박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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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퍼블릭 도메인>


1945년, 해방은 벼락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한반도의 운명은 또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이 거대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이었다. 제주도민들은 3.1절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는데,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군중들이 모여 이에 대해 항의하자, 경찰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아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6명의 무고한 주민이 사망하였고 이 사건에 도민들은 분개했다. 이들은 직장의 95%가 참여하는 전무후무한 ‘민·관 총파업’으로 맞서며 경찰의 사과와 처벌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들은 이 정당한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이 파업이 ‘남로당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며 제주도를 ‘빨갱이 섬(Red Island)’으로 낙인찍어 버렸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통치에 반기를 드는 제주도가 눈엣가시였을 것이고, 이를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으로 규정하는 것이 자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후 육지에서 응원경찰과 악명 높은 서북청년단(극우 성향의 단체다. 정치깡패로써 많은 고문과 학살과 같은 범죄를 일으켰다.)이 들어와 무자비한 검거와 테러, 고문을 자행하며 민심을 짓밟았다. (후에 기술하겠지만 이 모든 글은 전부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에 입각한 글임을 밝힌다.)


견디다 못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소총 30자루를 들고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탄압이면 항쟁이다”를 외치며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탄압 중지, 그리고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를 주장했다. 당시 5.10 단독선거는 곧 한반도의 영구 분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남았지만, 이는 곧 피의 보복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를 가만두지 않았다. 1948년 11월, 소위 ‘초토화 작전’이 시행되었다. 9 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선 5km 밖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군인들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심지어 미군 보고서조차 희생자의 80% 이상이 토벌대에 의해 사망했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이 참혹한 학살의 배후에는 작전통제권을 쥔 미군이 있었다. 미군은 제주도민의 생명보다는 남한을 반공 기지로 만드는 것을 우선시했고, 초토화 작전을 ‘성공한 작전’이라며 추켜세우기까지 했다. 결국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제주도민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청소해 버린 셈이다.


7년 7개월간 이어진 이 비극으로 당시 제주 인구의 10%가 넘는 2만 5천에서 3만여 명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도 편치 않았다. 연좌제의 굴레에 갇혀, 억울한 죽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가족이 몰살당하고 마을이 불탔지만, 그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다행히 민주화 이후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나 2000년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대통령이 국가 공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하면서 비로소 제주는 어둠의 역사에서 벗어나 ‘평화의 섬’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제주 4.3은 단순한 이념 대립이 아니라, 냉전이라는 거대한 파도와 국가의 잘못된 판단이 빚어낸 참혹한 비극이었다.


<제주 4.3 바로알기, 제주 4.3 평화재단>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제주 4.3 평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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