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의 음악> 촬영지
인천 앞바다에 떠 있는 작은 배들이 밀물을 기다리고 있다. 달과 태양이 서로를 밀고 당기는 사이, 갯골에서 작은 개울까지 물이 천천히 차오른다. 섶다리 아래로 사람과 물건 들을 실은 배가 도시 안으로 들어선다. 바다에서 시작한 여정은 개울을 지나 철도로 이어진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뭍으로 나와 저마다의 이야기를 보따리 풀듯 풀어놓는다. 쪽배를 타고 드나드는 인천의 서사가 배다리골에서 내륙까지 퍼져나간다.
19세기부터 지금까지 밀물과 함께 흘러온 이야기를 하나둘씩 들춰본다. 배다리골에 새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으며 그때의 일상을 그려본다. 우리가 파편처럼 흩어진 배다리골의 이야기를 다시금 그러모으는 이유는, 별것 아닌 일상을 기록하면 역사가 되고 하찮은 습관이 모이면 문화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제와 오늘을 이어 내일을 향해 걷는다.
배다리골의 이야기를 담은, 소박한 상영회가 곧 시작된다. 스크린에는 기쁨과 슬픔이 있고, 사람들의 숱한 이야기가 있다. 처연하고 찬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1899년 9월 18일 굉음과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인천역 앞 거리는 진귀한 광경을 직접 보기 위해 모인 구경꾼들로 가득하다. 거대하고 기다란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기계를 보고 누구는 ‘쇠 당나귀’라고 하고, 누구는 ‘화륜거(불을 뿜으며 달리는 수레)’라고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차 ‘모갈(Mogul) 1호’가 인천역에서 출발하는 날이었다. 개업 예식 다음 날 독립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를 각기 방 한 칸씩 되게 만들어 여러 수레를 철구로 연하여 수미상접하게 이었는데, 수레 속은 상중하 3등으로 수장하여 그 안에 배포한 것과 그밖에 치장한 것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대한 이수로 80리 되는 인천을 순식간에 당도하였는데 그곳 정거장에 배포한 범절은 형형색색 황홀 찬란하여 진실로 대한의 사람의 눈을 놀라게 하더라.
1899년 9월 19일 <독립신문> 기사 중에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차를 ‘황홀 찬란한’이라고 형언했다. 하지만 그 철로 위에는 비극적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들이 촘촘히 깔려 있었다.
1896년(고종 33년) 고종은 미국인 사업가 모스(Morse, J.R.)에게 철도 부설권을 허가한다. 당시 경인선 부설권을 두고, 미국과 일본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두 나라는 인천의 철도를 시작으로 중국까지 진출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기차의 등장은 물자와 인력의 이동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했다.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배로는 약 9시간 30분, 걸어서는 12시간 정도 걸리던 거리를 기차는 1시간 40분 만에 주파했다.
고종의 신임을 얻은 건 미국이었다. 모스에게 철도 부설권을 허가하기 1년 전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군은 경복궁 안을 무단 침입했다. 그들은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종은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러시아의 비호를 받으며 고종이 한 일은 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사업가의 손에 쥐여준 것이다.
철도 부설권을 허가받은 모스는 1897년 3월 쇠뿔고개에서 기공식을 열고 첫 삽을 떴다. 모스와 체결한 ‘경인철도특허조관’에는 허가일로부터 1년 이내에 공사에 착수해야 하고, 기공 후 3년 안에 준공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권리를 잃게 된다고 규정돼 있었다. 그는 철도 공사가 결정되자 미국으로 돌아가 투자자를 끌어모으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1만 킬로미터 넘게 떨어진 나라의 철도 공사에 돈을 대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본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부설권 확보를 위해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결성한 것이다. 투자 유치에 실패한 모스는 러시아와 프랑스 쪽과 만나며 부설권 양도를 진행하다 170만 2,000엔을 받고 일본에게 부설권을 넘기고 만다. 1899년 9월 18일 철도 개업 예식을 진행한 회사는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였다.
기차는 황홀한 축제처럼 철로를 달리며 비극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
당시 기차는 오전과 오후 하루 두 번 운행했다. 오전에는 인천역을 7시에 출발한 기차가 8시 40분에 노량진역에 도착하고, 노량진역에서 9시에 출발한 기차가 10시 40분에 인천역에 도착했다. 오후에는 인천역을 1시에 출발한 기차가 2시 40분에 노량진역에 도착하고, 노량진역을 오후 3시에 출발한 기차가 4시 40분에 인천역에 도착했다. 그러다 같은 해 12월부터 세 번 왕복으로 늘렸고, 이듬해 3월부터는 인천역과 노량진역을 하루 네 번 왕복했다.
도시가 휘황찬란해지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살 곳을 잃는다. 스스로 고향을 떠나는 이는 많지 않다. 대부분 힘 있는 사람에 의해 쫓겨나기 마련이다. 1876년(고종 13년)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의 강압에 의해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을 비롯한 청나라, 프랑스, 미국 등 각국의 상인이 인천으로 드나들었다. 도시는 빠르게 발전했고, 가난한 사람은 도시 바깥으로 밀려났다. 배다리골은 밀려난 이들이 모여든 곳이었다. 힘없는 사람에게 문명은 곧 쫓겨남을 의미했다.
1937년 일본의 도시 계획에 의해 나루터가 매립되었다. 더는 배가 닿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배가 드나드는 대신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국전쟁 이후 배다리골에는 길 잃은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고향을 등지고 낯선 도시에 발들인 실향민들이었다. 저마다의 슬픔과 희망을 등에 진 사람들이 배다리골에 보따리를 풀었다.
배다리에 시장이 차려졌다.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노점을 깔고 옷가지와 먹을거리 등을 가져와 팔았다. 전쟁을 피해 찾아든 실향민들은 옷가지를 수선하거나 만드는 일을 주로 했다. 지금도 중앙시장에는 이불, 한복, 커튼 등을 파는 혼수품 가게가 늘어서 있는데, 오래된 가게의 주인들은 대부분 실향민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길이 누군가의 축제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노포에는 여전히 행복한 얼굴을 한 예비부부들이 드나든다. 행복한 앞날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빛깔 좋은 비단옷을 입고, 따듯한 이불 속에서 맞는 외롭지 않은 밤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 희망 찬 미래가 밀려난 사람들의 손끝에서 탄생한다.
배다리 시장은 고향을 잃은 자들의 그리움이 환희로 변하는 곳이다. 이곳 사람들의 삶은 더는 처연하지 않다. 남에게 한 번이라도 행복을 선물할 수 있는 인생은 그 무엇보다 찬란하기 때문이다.
[중앙시장]
인천 동구 중앙로 68
032)763-4242
참고 문헌
곽현숙, 「배다리 헌책방거리」, 『황해문화』, 2013
조윤희, 「오래된 이야기를 사고파는 배다리 헌책방 거리」, 『월간 주민자치』, 2013
이희환, 「새로운 도시운동을 준비하는 인천 동구 배다리마을」, 『황해문화』,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