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마귀소년 Nov 19. 2021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외딴방에 차린 체육관

사진출처: www.pixabay.com




한때 만지작거리다가 흥미를 잃어 어딘가에 처박아놓은 것들을 생각한다.


  프라모델, 피아노, 태권도, 서예, 수영, 애니메이션 고등학교, 영어 회화, 컴퓨터 자격증, 프로레슬링, 비디오 게임기, 스케이트 보드, 타로 카드, 팝 가수 덕질, 일본 만화, 여자아이 머리 땋기, 동호회, 풍물, 손목시계, 머슬카... 시기를 달리하는 관심사를 두서 없이 끄집어낸 탓에 분야가 혼재한다.


  아련한 향수로 남아 간간히 떠올리는 것과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은 것이 있다. 어떤 건 준비물까지 다 갖춰놓고 하루만에 싫증이 나서 때려쳤고 또 어떤 건 꽤 오랫 동안 끈기를 갖고 두드려 본 것들이다. 어쨌든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족적이려니 한다.


  내가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잘하는 인간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쪽저쪽 발을 담가봐야하다보니 저 정도는 별로 어지러운 편도 아닐 것이다.


  선명한 발자국 하나를 회상한다. 중학교 3학년 겨울, 경기도에 있는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 지원했다. 90년대와 2000년대 명작 만화들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리기의 열정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그림에 대단한 재능이 없는 줄 알면서도 이상한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됐다.


  준비라고는 실기 시험을 몇 달 앞두고 미술 학원에 등록해 설렁설렁 스케치 몇 장, 수채화 몇 장 그려본 게 다였다. 방과 후 학원에 나오는 사람은 전부 고등학생들로, 예고를 다니며 대입을 준비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 눈에는 아마 만화를 따라 그리기 좋아하는 중학생이 놀러오는 걸로 보이지 않았을까. 학원 원장은 내가 열심히 끼적인 걸 쓱 보고 나름대로 지도해주었는데, 속으로 피식이나 했을까.


  입시 준비치고 너무 단기간 느긋하게 다녔기에 시험 결과는 당연히 탈락이었다. 실기를 치는 와중에도 내심 망했다 싶었다. 얼마나 속상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그쪽에 재능이 없다는 자각만큼은 분명해졌다. 만화는 즐거운 취미로서 남기고 진로로서는 깨끗이 단념했다.


  일반 대학 진학으로 방향을 잡고 나니 좌우를 살피려고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었다. 공부란 그냥, 일과로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성적 경쟁은 입학과 동시에 시작됐고 첫 모의고사부터 치고나가는 친구들은 기세가 대단했다. 넋 놓고 있다가는 나중에 낭패를 보겠다 싶어 덩달아 뛰기 시작했다.


  2학년이 되자 뚜렷한 희망 진로가 정해졌다. 그래 고지는 저기다! 무작정 뛰던 걸 멈추고 멀리 보이는 지점에 깃발을 꽂기 위한 등반을 시작한다. 그동안 억지로라도 길러놓은 체력이 도움이 됐다. 물을 마시고 땀을 닦기 위해 잠깐씩 서 있는 동안을 제외하곤 항상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나아갔다. 2년간 몸이 아픈 날이든 내신시험이 끝난 날이든 명절이든 교문을 나서서 집으로 가는 시간은 무조건 12시여야 했다. 공부가 손에 하나도 안 잡히는 날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오기로라도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수능 공부는 자원의 투입과 그로 인한 산출이 비례하는, 진정으로 해볼 만한 투자였다. 그래프가 단기적으로는 상승과 하락을 오갔지만 3년 간의 추이를 보았을 때는 확실히 우상향 곡선을 그렸다.


  물론 3년간의 준비에도 돌파할 수 없는 장벽은 있었고, 통지표를 받아들었을 때 그것을 수치로써 확인하는 기분은 떨떠름했다. 이게 내 능력의 진짜 한계구나.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의 실기를 망친 것과는 결이 확연히 달랐다.


  어찌됐든 중3의 좌절과 고3의 성취는 인생을 살아갈 방침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게 있다면 닥치고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좀 느리더라도 관두지 말고 끝장을 볼 때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되도록 싸움을 피하고 되도록 평온하게 살고 싶은 나같은 사람일수록, 반드시 싸워야만 하는 상대를 신중하게 골라 힘을 제대로 소진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주3회 근력운동을 시작한지 2년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파워리프팅의 등급표 기준(운동별 중량으로 입문자-초보자-중급자-고급자-엘리트를 나눠 놓았다)으로 나는 아직 중급자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왜 몸의 기틀이 금방 잡히지 않는가, 중량은 금방금방 늘지 않는가를 내심 초조해 했는데, 생각부터 글렀다. 반성한다.


  왜 성장이 더딘지 생각할 시간에 입 다물고 한번이라도 더 들어야 한다. 멈추지 않으면 아주 조금씩일지언정 나아간다. 끝장을 볼 때까지 느리더라도 계속 밀어붙여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