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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Dec 10. 2021

신사의 신발장

Oxford not brogues


Oxford not brogues(브로그 없는 옥스포드화)


  킹스맨 요원의 비밀 암호는 신사의 신발에 대한 확고한 정의다. 끈으로 매듭을 짓는 정중한 신발. 되도록 장식을 배제할 것. 대신 질 좋은 소재와 유려한 곡선으로 우아함을 드러낼 것.


  어렸을 때부터 여러 형태와 소재의 신발을 신어봤지만, 어떤 것이든 2~3년이 지나고보면 많이 낡는 데다 유행에 뒤떨어져보인다. 처음 신발장에 모실 때의 애착은 온데간데 없고 구석에 처박아놓거나 쓰레기 봉투에 들어가는 일만 남는다.


  신사됨을 추구하는 남자는 뭘 신고 다녀야 하나? Classic is the best. 모름지기 시간의 세례를 받은 것을 따른다. 운동화보다는 구두가, 구두 중에서는 옥스포드화가, 또 옥스포드화에서도 앞코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플레인토(plain toe)나 앞코에 일 자 형태의 이음매가 있는 스트레이트팁(straight tip)이 가장 고전적이다.




  신발장의 첫 구두는 스페인 브랜드인 버윅(Berwick)의 검정색 스트레이트 팁 옥스포드다. 이걸 장만했을 땐 결혼을 앞두고 네이비색 서지 원단의 수트를 한 벌 맞춘 뒤에, 예복에 어울리는 신발을 찾고 있었다. 알아보니 예복에는 일반적으로 검정색 스트레이트팁이나 갈색 스트레이트팁이 잘 어울리고 취향에 따라 갈색 윙팁을 신기도 한다.


  신사화로서는 처음이니 가장 클래식한 것을 골라야한다 싶었고, 어쩐지 갈색은 품위가 없어보여서 검정색 스트레이트팁으로 결정했다. 가격은 30만원 대로 막눈으로 보기에도 가죽 질이나 마감이 괜찮았고 무엇보다 날렵한 쉐입이 마음에 들었다. 이걸 신고 결혼식을 치렀고 이후에 각종 경조사, 친척을 만나는 자리, 직장 내 행사 등 격식이 필요한 자리마다 신고 나갔다. 신발을 잘 관리한 편은 못되지만 장만한 지 6년 차인 지금의 컨디션도 그리 나쁘지 않다. 욕심이 생겨 같은 스타일의 더 비싼 걸 사려고 알아본 적도 있으나, 처치스(Church's)나 크로켓 앤 존스(Crockett & Jones)와 같은 영국 상위 브랜드를 시착하려면 서울까지 가야했다. 차비에 구두 구입까지 예산이 100만원 가까이 필요해서 포기했다.


  두 번째는 영국 브랜드인 로크(Loake)의 검정색 더비 슈즈다. 스트레이트팁 옥스포드가 수트 쪽이라면 이건 컨템포러리와 일반 캐주얼 쪽이다. 영국 해군 단화의 모습을 본뜬 신발로, 라인이 적당히 날렵하고 반짝이게 가공한 폴리쉬드 레더인 점이 마음에 든다. 같은 검정색이라 해도 버윅의 스트레이트팁과 비교하면 힘을 뺀 느낌이며, 닥터 마틴(Dr.Martens)의 더비 단화에 비해서는 훨씬 단정하다. 적당히 세련되었다. 내가 가장 자주 하는 차림인 재킷-셔츠-슬랙스 또는 코트-니트-슬랙스 차림에 궁합이 좋은 편이라 일주일에 한두 번꼴로 신게 된다. 이쪽 계열의 끝판왕으로는 미국 브랜드인 알든(Alden)의 더비가 있다고 하는데, 역시 가격이 100만원이다. 10년을 신는다고 해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세 번째는 국내 브랜드인 헤리티지 리갈의 더블 몽크 스트랩(monk strap)이다. 앞선 스페인과 영국 구두를 거치고 나서 국산 신발을 찾다보니, 남성 복식 관련 카페에서는 헤리티지 리갈 외의 국내 브랜드 제품은 제대로 된 신발 취급도 하지 않는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리고 헤리티지 리갈 중에서도 7000번대라고 하는, 정가 40만원 대가 주된 추천의 대상이었다. 드레시한 정도로 따지면 버클과 벨트가 달린 더블 몽크는 앞서 구입한 것들의 중간쯤이라 정장과도 슬랙스 청바지와도 조합이 가능하다. 검정색만 두 켤레를 샀으니 갈색으로 갈 법도 했는데, 매장에 가서 실물을 보니 조금도 흥미가 가지 않았다. 그보다 갈색 스웨이드 소재의 더블 몽크가 의외로 괜찮았다. 고민하다가 또 검정색으로 갔다. 그걸 살 때 수트를 자주 입던 시기라 수트와의 조합에 더 무게를 두었기 때문인데, 요샌 수트보다 니트와 슬랙스 차림을 많이 해서 조금 후회스럽다. 별 수 있나. 다 떨어질 때까지 신는 수밖에.


  네 번째헤리티지 리갈의 페니 로퍼(penny loafer)다. 로퍼는 끈이 없는 슬립온이라는 점에서 확실한 캐주얼 스타일의 신발이다. 인터넷 상에 떠도는 무수한 로퍼 착용 사진을 찾아보면서 어떤 색상과 어떤 소재를 선택할지 고민했다. 갈색과 검정색 외에 버건디라는 제3지대가 있었고, 스웨이드와 가죽의 두 갈림길을 지나야했고, 끝이 날렵한 것과 뭉툭한 것, 아니면 중간쯤인 것 중에서 하나를 결정해야했다. 이번엔 스웨이드와 갈색도 확실히 괜찮았다. 그래서 초코브라운 스웨이드도 신어보았는데...그랬는데 또 검정색을 사게 됐다. 생지 데님에 검정색 로퍼를 멋들어지게 신은 연예인의 광고를 본 탓이었다. 잘 익은 초코브라운색 스웨이드 로퍼가 지금도 아른거린다.


  헤리티지 리갈이란 브랜드는 신사가 갖추어야 할 7가지 신사화 스타일을 제안했는데, 내 취향엔 위의 4가지로도 충분한 것 같다. 구두는 운동화에 비할 바 없이 내구성이 좋고 유행이란 것도 없으며 무엇보다 실루엣이 아름답다. 4가지 라인업을 적게는 10년 신을 것 같고, 관리만 잘 한다면 20년까지는 신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신발을 하나씩 장만하면서 슈케어 방법도 익혔고, 최소한의 슈케어 용품도 갖추어놨다. 일주일에 한번씩 돌려 신고 주말엔 현관에 그것들을 다 꺼내 한꺼번에 슈케어를 한다. 그러다보면 신발들에 애착이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번외로 로크의 데저트 부츠가 하나 있다. 스웨이드 소재이며 색상은 보통의 갈색이다. 예전엔 흰색 고무창이 달린 레드윙(Red Wing) 스타일의 워크 부츠가 좋았는데, 007시리즈를 섭렵하고 나서 제임스 본드가 영화에 신고 나온 스타일과 비슷한 걸 찾았다. 슬랙스, 치노 팬츠에 두루 좋지만 청바지와의 조합을 가장 좋아한다. 청바지의 밑단을 한번 접어 올려서 신발을 완전히 드러내는 식으로 코디한다. 겨울에 가장 많이 신기는 하지만 스니커즈만큼 편하고 멋도 있어 사계절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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