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까마귀소년 Feb 28. 2022

롱호스: 드러냄과 감춤

사진 출처: enrichseoul.com


남성의 복식, 특히 클래식한 복식에서는 맨살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아이템은 양말이다.  
-윤혜미, <남자의 멋 품 격>

'신사는 맨살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영국식 신사도의 법칙  
-이현, <신사용품>


  롱호스long hose는 종아리를 덮고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이다. 종아리 위를 덮는다 하여 OTC(over the calf) socks 라고도 한다. 긴 양말류 가운데 우리에게 친숙한 명칭은 니 삭스knee socks인데 이는 길이가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점, 주로 아동과 성인 여성들이 신는다는 점에서 롱호스와 다른 종류다.


양말의 길이에 따른 분류. 출처 enrichseoul.com

  

  니 삭스라면 진저리 나는 경험이 있는데 대체로 희미한 유년기의 기억 중에서 유별나게 또렷하다.   때는 90년대 초였고 예로부터 패션에 일가견이 있던 아버지는 '다소 큰돈을 들여서라도 좋은 옷을 사입어야 한다'라는 지론을 어린 내게도 적용하였다.


  사진첩을 뒤적이면 유년기 무렵 외출복 차림은 그야말로 꼬마 신사나 다름 없다. 헌팅캡으로 시작해 재킷, 멜빵에 반바지, 니 삭스와 로퍼까지 완전한 착장을 갖추고 있는데 하나같이 아동복 전문 브랜드가 아니면 볼 일도 없는 품목들의 조합이다.


  화사한 옷과 대조적으로 나의 표정은 어둑어둑하다.  어린이에게 옷이란 대문짝만 한 캐릭터가 첫째요, 팔다리의 움직임이 편안한 게 둘째요, 알록달록한 색상이 셋째쯤 된다. 외의 요소들이란 어른의 눈에나 흡족할 뿐 어린이들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선명한 장면은 5살, 아니면 6살이었을까. 현관에 퍼질러 앉아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어머니께 떼를 썼다. 평소 유치원에 가기 싫은 이유가 10가지쯤 되었지만 그날은 오직 흰색 니삭스를 신기 싫은 데 있었다.


스타킹 신기 싫어요!
친구가 놀린단 말이에요!


  자고로 5살이면 남녀유별의 이치를 깨치기에 충분한 나이다. 남아로 태어난 자, 후뢰시맨이나 울트라맨 티셔츠에 파랑색 고무줄 바지로 족하다. 여인의 전유물인 스타킹이 웬말인가.


  겨우 눈뜬 성 정체성을 송두리째 거부하는 순백의 니삭스 앞에서 나는 전신全身으로 울었다. 한두 번은 거부했을지라도 실랑이에서 매번 이기진 못하였으리라.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입히는 대로 입고 간 날 동무들은 진심으로 비웃었을테고, 나는 온종일 어둑어둑하다 돌아왔다.




  그로부터 훌쩍 자라 나는 클래식 복식에 빠진 어른이가 되었고, 이제 종아리를 덮는 긴 양말은 없어서 못 신는 아이템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름만 알았지 어디서 파는지를 몰라 한참이나 헤매었다.


첫 번째 시도: 쇼핑창에서 '신사용 양말'을 검색한다. 나오는 제품들은 길이가 발뒤꿈치에서 15cm 가량 올라오는 게 한계다. 롱호스라고 검색하니 엉뚱한 고무호스만 수십 개.


두 번째 시도: 백화점 쇼핑몰에서 다시 '신사용 양말'을 검색한다. 세부 탐색 옵션을 켜 신사복 브랜드만을 선택한다. 결과를 살펴보니 별반 다르지 않다. 상세 표기란에서 발의 길이는 알려주지만 양말이 어디까지 올라오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세 번째 시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검색창에 '니삭스'로 검색한다. 그 옛날의 악몽을 재현하듯 아동용 흰색 니삭스가 최상단에 주르륵 떠오르고 그 아래로 여성 잡화, 골프 잡화의 카테고리가 보인다.  


마지막 시도: 어쩔 수 없이 손품을 한참 팔아 클래식 아이템을 파는 편집숍을 알아낸다. 롱호스가 있다! 한 켤레에 16,000원쯤 하는 가격에 잠깐 머뭇거리다가 후기를 읽고는 마음을 정하였다. 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귀하다. 언제 품절될지 몰라 한꺼번에 10켤레쯤을 쟁인다.  


  왜 이다지도 긴 양말에 집착을 하느냐면, 클래식 기본서를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신사는 맨살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라는 문장이 날아와서 콱 박혔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길든 짧든 좋았던 양말 길이가 그 다음부터 무척이나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직장에서, 식당에서, 시사 프로그램에서, 대선후보토론회에서... 신사들은 어디에서나 다리털이 숭숭 난 맨살을 내보이고 있었다.


  문제는 수트에도 있다. 수트 바지의 총장은 모종의 이유로 해가 갈수록 깡총해지기를 거듭하여, 이제는 밑단이 구두를 살짝 덮거나 아예 구두 끝에도 닿지 않을 만큼 위로 올라가버렸다. 통이 좁고 짧은 바지에 짧은 양말을 신은 남자는 공들여 찍은 화보에서나 맵시나 보일 뿐, 실제는 품위와 한참 먼 모양새를 하게 된다. 짧은 바지는 앉아 있는 동안 맨 다리를 훤히 드러냄은 물론 살갗에 밀착해서 말려 올라가기도 한다.


  분명 책에서는 영국식 신사도라고 했는데. <007>에서, <킹스맨>에서 빛나던 그것이 물을 건너오면서 변질된 것일까. 아니면 한국 남성들은 우리땅에서 자생한 코리안 신사도를 따르고 있었을 뿐인가.




  다행히 나는 예로부터 드러냄보다는 감춤에 익숙했다. 생애를 통틀어도 남들 앞에서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며, 순도 높은 부끄러움이 가벼운 자랑질도 용납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아무리 작은 재주라 해도 남들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작은 재주를 호의로 치켜세우는 말을 남들의 입에서 들을라치면, 그로 인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상황이 되면, 나는 혼란에 빠졌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안면 근육부터 손가락 말단까지 명령을 듣지 않는다. 마땅한 말도 생각나지 않는다. 경직된 수준을 넘어서서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펄쩍 뛰며 부인하거나 침묵할 수도 없는 일이다. 고민 끝에 내린 대책은 혼란스러움을 감추고 겸손의 미덕으로 포장하는 것. 대책의 모의 훈련을 여기 옮긴다.


1. 직장 동료로부터 갑작스럽게 칭찬이 나왔다!
2. 일단 침착해라.
3. 자연스럽게 웃는 표정을 지어라.
4. 3번과 함께 작은 손사래를 쳐서 좌중에게 겸손의 제스처를 확인시켜라.
5. 짧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눈치를 살펴가며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려라.
6. 애초부터 위와 같은 상황을 만들지 말아라.


  나는 대단치 못한 자랑거리라도 화두에 오를까봐 그것들을 재킷의 안주머니에 꼭꼭 감춰두었다. 쓰임을 필요로 하는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만, 아끼는 만년필처럼 슬쩍 꺼내었다. 서류에 서명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내 만년필의 브랜드 이름이나 가격대를 알아보지 못하게끔 하였다. 손아귀로 가리면서 휘리릭 서명을 마치고는, 그것을 꺼낼 때와 마찬가지로 교묘한 손놀림으로  안주머니에 집어넣는다.   


  반짝이는 자랑거리조차 그러할진대 부끄러움은 말해 무엇할까. 신사여서가 아니라 그저 부끄럼 많은 한 남자로서, 털난 종아리를 훤히 내비치고 싶지 않다. 바깥에서 만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못난 구석과 모난 구석을 보이고 싶지 않다.


  내겐 한여름에도 종아리를 다 덮는 긴 양말이 필요하다. 내겐 감춤이 드러냄과는 견줄 수 없이  중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계가 부리는 농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