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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Feb 02. 2022

시계가 부리는 농간

들여다보면 심오하고, 한발짝 떨어지면 아무 것도 아닌 세계

사진 출처: pixabay




  시계는 일개의 사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 사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마성魔性으로 나를 조종하는 것처럼 느끼는 때가 있다. 때나 기회가 멀어졌을 때는 시계에 대한 관심도 시야 밖으로 밀려나지만, 운때가 맞아떨어지면 갑자기 관심이 눈 앞을 아예 가로막아버리는 수준으로 다가온다. 시계를 가지고 싶은 욕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돈을 수백씩 모았다가 다시 흩어버리고 또다시 모으는 짓을 하고 있으니 무슨 농간에 넘어간 게 아닐까 싶은 심정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건 티쏘(TISSOT)의 르 로끌(Le locle)이다. 르 로끌은 입문용 오토매틱 시계의 대표격으로 내구성, 마감, 기능성, 디자인 등 여러 면에서 검증이 되어 있다. 결혼을 앞두고 반지와 함께 준비한 예물이었다.


  예물이라는 말에 기대어 한방에 고가의 시계를 장만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는데 그땐 그 고가 시계라는 것이 전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었다. 백화점에 들러 실물을 본다는, 예물 준비에 동반되는 최소한의 절차조차 생략하고 오로지 인터넷 상품평, 블로그 포스트에 기대어 산 시계였다.


  결과는 의외로 만족스러웠다. 결혼 전까지 예외 없이 배터리로 작동하는 시계만을 차서였는지 기계식 시계가 지닌 여러 특질들-째깍이는 소리, 장치의 움직임, 아날로그 감성, 시계의 역사-이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초기의 감상에 다소 과장을 섞자면 정교하게 만들어진 소우주를 손목 위에 올리고 다닌다는 느낌이라 할 수 있었다.


티쏘의 르 로끌 파워매틱 80. 출처: tissotwatches.com

  사치재로서의 시계에 눈뜸은 그로부터 2년쯤 뒤에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다니엘 크레이그 주연의 <007> 시리즈를 보면서부터였다. 전대의 피어스 브로스넌에서 새로운 주인공으로 바뀐 첫 영화가 나온 게 2006년인데 개봉으로부터 10년도 훌쩍 지난 시점에 우연한 기회로 끝까지 본 게 시작이다.


  007 영화의 오랜 스폰서인 오메가(OMEGA)의 다이버 시계를 찬 제임스 본드는 멋의 화신 자체였다. 톰포드 수트, 크로켓앤존스의 구두, 애스턴 마틴의 스포츠카 등 영화에 나온 건 뭐든 눈을 홱 돌아가게 만들었지만 엔딩 크레딧까지 보고 나서도 잔상으로 남아있던 건 손목 시계뿐이었다.


  제임스 본드의 멋은 한낱 시계가 아니라 스파이라는 역할이라든지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씬이라든지 탄탄한 몸집으로 완성한 수트빨의 총합임을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내 마음은 시계의 마성에 현혹되어 있었다. 영화에 나온 시계를 어떻게든 한번 손에 넣어보고 싶어졌다.


오메가의 시마스터 300을 찬 제임스 본드. 출처: omegawatches.kr


  이렇게 하나의 물건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올 때가 가끔 있다. 그때부터 내 마음 속 1순위 시계는 오메가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평생 차고 다닐 수도 있는 데 살까? 아니야. 시계 하나에 500~700만 원은 과하다. 그래도 내 용돈을 2년 간 하나도 안 쓰고 모은다면? 수트에 드림워치를 걸친다면 제임스 본드 룩이 완성될텐데.


  체형과 얼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런 공상도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었다. 도저히 제값을 주고 살 수는 없었고 아쉬운 대로 대체품을 찾아보곤 했다. 상상 속 예산은 언제나 0에서 시작해서 500, 700, 1000만 원을 넘나들었다. 클래식 복식에 다이버 워치를 차는 그 날을 그리며 용돈을 1년쯤 모아 300만 원 정도는 마련했다.


  300만 원으로 백화점의 정품 시계는 어림도 없고, 연식이 있는 중고품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결국 씨마스터 300의 중고품을 구해 잠깐 손목에 올려보았다. 확실히 내가 차고 다니던 티쏘에 비해 기능과 디자인적 측면에서 우수했다. 바꾼 시계를 단박에 알아보는 사람들과 잠깐씩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오메가의 씨마스터 300. 출처: omegawatches.kr

  상상으로 그려낸 환희, 자기만족, 클래식 워드로브와의 조화, 스파이가 된 듯한 기분 같은 건 없었다. 원했던 걸 손에 넣었으니 이대로 정착을 하나 싶었는데 어쩐지 마음 편히 차고다니지 못했고 결국 처분했다. 그리고 비슷하거나 조금 더 고가의 시계들도 씨마스터의 수순을 따르는 것처럼 갈구하고, 손에 넣고, 만족했다가, 갸우뚱했다가, 제각기 다른 주인에게 떠나보냈다.


  애를 써서 마련해놓고 금세 처분한 이유를 대자면 열 개는 되겠지만 결국은 소유관 문제로 귀결된다. 물건을 소유하려는 욕구는 삶의 의욕을 끌어올리고 노동의 괴로움을 감소시켜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그것도 적정한 정도일 때가 좋다. 우리집 재정과 내 용돈의 액수를 고려했을 때 오메가는 적정한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다.


  한발짝만 멀어져보니 허울 안쪽의 본질이 보였다. 집에 멀쩡한 걸 놔두고도 열 배쯤 비싼 하나를 더 욕망하고, 새해가 되어 가격이 인상되지 않을까 신경쓰고, 다른 소비를 줄여가며 아득바득 돈을 긁어모으고, 돈이 준비되고나서 정작 물건이 없을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이렇게 추운 계절에 백화점 오픈런 같은 건 누가 돈을 준대도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값비싼 시계들에게 계속해서 눈길을 보내는 동안 정작 티쏘는 통 차고다니지 않게 되었고, 언제부턴가 책상 선반에 늘 같은 시각과 날짜를 가리키며 얌전히 앉아 있다. 방의 정물 중 하나가 된 지 오래다. 험하게 쓰는 통에 밝은 불빛에서 상처가 많고 시계 줄 사이사이에 먼지도 적잖이 끼었다.


  지금이라도 시각을 맞추고 손목을 몇 바퀴 돌리면, 그 공백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즉시 예전처럼 작동할 것이다. 확인할 필요도 없다. 바로 그 점, 언제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안일한 마음으로 방치해둔 게 새삼 미안하다.


  어디 시계뿐일까.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줄거라는 안일함으로 잊어버리고 살아왔던 모든 존재에게 미안한 새해 첫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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