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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Jan 25. 2022

셋업과 드레스다운

격식과 편안함을 함께 갖출 복장을 생각한다

사진출처: instagram.com/jillstuartnewyork_official




  정통 클래식에 기반한 남자의 복식은 날로 그 영역이 좁아져 이제는 한줌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일부 직군 일부 회사를 제외하면 완전한 정장 차림을 요구하는 곳이 드물다. 대기업부터 복식문화에서 타이를 덜고, 재킷을 강제하지 않고, 구두 대신 운동화를 허용한 것을 시작으로 그보다 규모가 작은 기업들도 차례차례 드레스 코드의 제약을 풀어가는 중이었다.


  4년 전 클래식 복식소개하는 서를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그런 흐름을 무시했었다. 오히려 일년 내내 수트 차림을 할 거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딱 1벌 뿐이던 네이비 수트에 어울리는 구두, 실크 타이, 드레스 셔츠, 브리프 케이스를 차례로 마련하였으며 네이비 다음으로 범용성이 높은 그레이 수트를 갖춤으로써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매일 아침 거울에 비친 차림새에 그런 대로 만족하며 언젠가 수트만 5벌을 채우리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서서히 번져가던 들불과 같던 드레스 코드의 변화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나 거침 없이 타올랐다. 직장 구성원들 간의 접촉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행사가 대폭 축소되거나 없던 일이 됐으며, 업무 환경이 전면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흐름은 내가 근무하는 직장, 그리고 같은 업계의 인근 직장에도 나타났다. 복장을 갖고 왈가왈부하던 자들은 입을 다물었고 동료들은 그런 흐름에 자연스레 편승하였다.


  작년을 통틀어 격식 있는 차림을 할 적은 공식 행사가 있는 2~3번 정도였으며, 그러한 날이라도 동료들은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평상시의 복장에서 재킷 하나를 걸치는 정도로 그친다. 분위기가 이렇기에 내가 완전한 정장으로 출근하는 날은 동료로부터 '무슨 일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빠지지 않고 듣게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홀로 포멀함을 고집한다면, 개인의 취향으로 봐줄 만한 수준을 넘게 된다. 자율적인 문화가 정착된 데 만족하는 동료들에게 불편함을 끼칠 수 있다. 땀이 많은  체질이나 몸을 움직여야 하는 업무의 특성을 고려했을 때도 수트가 거추장스러운 날이 종종 다. 2년을  채우고 고집을 내려놓았다. 대안을 찾아나설 때였다.


instagram.com/cambridge_members


  남성복 브랜드는 복식 문화의 변동을 파악해 몇 년 전부터 체질을 개선하는 중이다. 수트가 통 팔리지 않게 되었으므로 백화점에 입점한 고급 브랜드들이 거품을 뺀 가격의 수트를 찍어낸다. 수트라는 모양새만 갖추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런 제품이 적격이다. 또는, 구두와 타이 없이도 수트 느낌을 낼 수 있는 셋업을 만든다. 셋업이란 본디 컨템포러리 브랜드에서 잘 팔리는 아이템들로서 원래라면 정통 남성복 브랜드들이 취급도 하지 않을 물건들인데 콧대를 낮춘 것이다.


  이제 브랜드 이름을 가리고 매장을 둘러봤을 때 포지셔닝이 불분명하게 느껴진다. 남성복의 정체성이 근간부터 흔들린다는 증거다. 남자들은 더 이상 어깨선이 반듯하고 허리가 들어간 재킷을 입지 않는다. 힘센 다림질로 바지의 줄을 잡는 남자는 극히 보기 드물다. 기존의 남성복 브랜드는 이런 외면으로 인해 해마다 사라지거나, 살아남기 위해 브랜드 이미지를 바꿔가는 중이었다.


  다른 말로 드레스 업(dress up)이 아닌 드레스 다운(dress down)이 대세다. 재킷 한 벌을 맞추기 위해 보통 사람들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세세한 디테일을 고집하는 사람은 세상의 흐름에 동떨어지다 못해 거스르려고 애쓰는 꼰대로 보는 인터넷 반응마저 확인했다. 매일 수트 차림을 하는 건 대세에 맞지 않으며 자기 만족과 타인으로부터의 보상도 얻지 못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굳이 그런 시선까지 감수하면서 복식을 고집할 신념은 없다.


ssfshop.com/Theory


  대안은 셋업 수트다. 이는 하나의 옷감으로 만든 재킷과 팬츠 조합이라는 점에서는 수트와 같지만, 그 외에는 어떤 점도 서로 같지 않다.


  먼저 셋업은 셔츠, 타이, 구두, 벨트 중 어느 것도 필수 사항이 아니다. 드레스 셔츠가 아니라 캐주얼 셔츠, 라운드넥 풀오버, 터틀넥 풀오버, 라운드넥 티셔츠 등 뭐든 호환 가능하다. 타이는 실크로 된 것이든 니트조직이든 매지 않든 상관 없다. 끈을 매는 구두가 스니커즈, 로퍼, 샌들로 대체가 된다. 벨트는 하지 않는 편이 더 멋스럽다. 이렇게 강제성이 없으므로 어떤 복식과도 믹스매치할 수 있다.


  다음으로 셋업은 수트와 달리 천연 소재로 된 옷감을 쓸 필요도 없다. 물론 모와 캐시미어 실크를 사용하는 고급형도 있지만 그보다는 활동성을 강조한 합성 소재로 된 제품이 훨씬 다수다. 어떤 건 아예 물세탁이 가능하다는 점을 내세우기도 한다. 섬세한 소재로 만들어진 수트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활동성과 관리의 편이성을 모두 갖췄다.


  세 번째로 셋업은 핏이 다양하다. 어깨선이 정직하다든가, 소매 길이가 손등을 반쯤 덮는다든가, 바짓단이 구두끈 구멍의 몇 번째에 닿아야한다든가 하는 규칙이 정해진 바 없다. 세미오버핏이든 오버핏이든 정직한 핏이든 유행에 따라 만들어내고 유통되어 취향껏 선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셋업은 저렴하다. 수트는 입을 만한 걸 사려면 아무리 못해도 30은 줘야하겠지만, 셋업은 10 내외에도 한 벌을 맞춘다. 백화점에서 살 수 있는 셋업 중 가장 비싼 축에 속하는 띠어리의 뉴테일러라고 해도 정가로 120 정도다. 고급 수트는 백화점 정가로 200 이상이다. 나와 비슷한 나잇대의 남자 중에 고급 수트를 살 사람은 소수라 해도, 띠어리 셋업을 사는 사람은 꽤 있다고 생각한다.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서 본 어떤 남자들은 예복을 띠어리 셋업으로 대신함으로써 평상시에도 활용한다고 했다. 굉장히 현명한 선택이다.


  드레스 다운의 도도한 물결에 몸을 맡겨, 수트는 경조사나 공식적인 행사 때 입을 이다. 대신 주력으로 입을 셋업을 몇 개 갖춰놓고 상황에 따라 코디만 바꾸는 게 좋겠다. 어떤 날은 타이와 셔츠로 포멀함을 강조하고, 다른 어떤 날은 티셔츠 위에 걸쳐 가벼운 느낌을 살리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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