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용도
작년에 읽고 또 읽는 사진의 용도.
만나는 사람마다 아니 에르노教에 가입하라고, 포교활동 수준으로 오해를 받았지만, 순수하게 내돈내산인 사진의 용도.
젠트리피케이션의 간접 피해자인 나는 서울 서촌에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쌓아 올리다가 2000년대 후반부터 불어온 ( 북촌에 비해 좀 늦었지만 ) 부동산 가격 상승에 실향민이 되어, 가끔씩 서촌에 간다. 이사한 지 7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우리 동네로 남아있는 서촌. 작년에 우연히 걷다가 발견한 동네 서점에서 사진의 용도를 발견하고, 대형 서점 장바구니에 담겨 있는지 오래된 아이 대신 데려왔다. 동네에서 마음에 드는 서점에서 산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책. 심지어 읽을 때마다 더 좋다. 처음엔 아니 에르노에 그다음엔 마크 마리의 글에 끌렸다.
라떼는 ‘냉정과 열정사이’ ‘사랑 후에 오는 것들’과 같이 남/녀 작가가 서로 다른 주인공의 입장에서 같은 일을 서술하는 글을 인기 좀 있었는데, 그런 느낌의 사진 에세이다. 사진이 컬러였다면, 아마 나는 이 책을 한 장 한 장 코팅해서 제본했을 지도.
어떤 사진도 지속성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사진은 대상을 순간에 가두어 버린다.
사진이 가진 특성에, 특정한 사건 뒤의 ( 커플인 두 남녀의 정사 뒤의 모습을 사진을 찍어 남기고, 그날의 기록을 각자 기록한 글이다) 일 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미사여구 없이 써 내려갔다.
사진의 상징적인 의미가 너무도 분명하여 상황의 우연성에 대한 정당한 의심을 품게 된다.
이 책에 있는 각 사진들에 대한 설명이 없었으면, 그냥 카메라 셔터가 잘못 눌린 사진이거나, 테스트용 사진이라고 오해할 번한 사진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에 사진에서는 글을 쓰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찍긴 했지만, 예술적으로 찍기 위한 어떠한 계산적인 시도가 보이지 않는다. ( 물론 나만 못 본 것일 수도 있다. )
매번 동정을 받을 때마다 나 자신이 사람들에게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명백한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유방암에 걸린 아니 에르노가 굉장히 덤덤하게 ( 내가 그냥 덤덤하게 읽은 거 일 수도 있다. ) 있었던 일 들을 담담하게 서술해서 아니 에르노가 암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망각했다. 죽음을 껴 앉은 사랑이라니. 로맨틱한 사이의 로맨틱한 일상이지만, 로맨틱하려고 이런저런 요소를 쏟아놓지 않아 좋았다. 아니 에르노가 마크 마리의 전 부인이 안 예뻤음에도 마크 마리가 그녀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질투를 드러내는 부분도 좋았다. 암에 걸린 이후 변해버린 외면(外面)을 외면(外面) 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묘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낸 모습이 담대하게 다가왔다.
죽음은 성가시나 우리의 사랑에 도달하기에는 미약했다. 사랑이 죽음을 이긴다는 전설은 지나치게 아름다워 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게 되고 말았다.
책을 덮으면서 아니 에르노와 마크 마리가 함께한 여행한 아름다운 오베르 쉬즈 우아르, 베네치아, 브뤼셀 등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떠올리며,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지금, 그곳들로 향하는 내 마음을 이 책에 묻어두며 책을 다시 덮었다. 글을 쓴다면 꼭 이런 에세이류를 내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느꼈다.
사진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글 들도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을 작품에 가둬둔다. 이미 카메라를 통해 포획해온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를 떠올리며, 다음에 그곳을 방문할 때는 아니 에르노를 생각해봐야겠다. 갑자기 프랑스어를 다시 배우고 싶어졌다.
나는 당신을
아니 에르노의 세계로 데려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