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 학기말 방학 동안 부모님 댁에 맡겼던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아이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을 때까지도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몸을 비비 꼬고 있었다. 화제를 돌려야겠다 싶어 유치원 선생님처럼 살짝 높은 톤으로 광대를 한껏 올리며 운을 띄웠다.
"우와~ 은우(가명) 내일부터 '빛나는반' 올라가네? 유치원에서 제일 형님이네 이제?!" 그랬더니"아 맞다! 드디어 내일! 형님반 된다!" 하며 두 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 보인다. 동글납작한 아이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진다.
그러더니 대뜸 나를 보고 한다는 소리가 "엄마도 이제 사십 살 되는 거 맞죠?" 이러는 거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닌데! 엄마 이제 서른여덟 살 되는 건데?" 하고 없어 보이게 급히 대답하고 말았다. 아이는 나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읭? 원래 삼십구 살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사십 살이죠!!" 하며 어른이 왜 이런 쉬운 숫자 계산도 못 하냐는 듯 나를 나무랐다.
나는 멋쩍어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 아니, 그게 말이지...... 그러니까 작년에 법이 바뀌어서 우리나라 사람들 전부 다 만 나이로 통일하기로 했거든! 그래서 엄만 올해 만 서른여덟 살이 된 거야. 은우는 만 다섯 살인데, 나이 주는 건 싫다고 해서 그냥 일곱 살이라고 말한 거지. 사실은 만 다섯 살이란다......"
나의 길고 상세한 설명에도 아이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포도알 같은 눈만 끔벅거렸다. 할 말이 남은 얼굴이었지만 내 말에 더는 토를 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이해가 됐나 보다 하고 나도 얼른 워커에 발을 욱여넣고 아이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할아버지 차를 타고 아이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출발한 지 십 분이나 됐을까? 일정한 속도로 뒤로 멀어져 가는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며 멍때리고 있는데, 아이가 불쑥 말했다.
"엄마, 사십 살인 거... 그냥 인정해요! 맞잖아요, 사십 살!!!"
아이의 말에 나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라 여겼는데, 아이에게는 '나이'가 무척이나 중요한 이슈였나 보다. 설날마다 떡국도 열심히 먹고, 길고 긴 하루 동안 열심히 놀고 배우면서 이룩해 낸 한 살 한 살이 아이에게는 인생 최대의 '자산'이었다. 그걸 법이 바뀌었다는 황당한 이유로 2년씩이나 후려쳤으니, 가만히 앉아서 날치기를 당한 심정이었겠지.
엄마한테 소리를 빽 지르며 얼른 사십 살인걸 인정하라고 당차게 요구한 것도 결국 40살인 엄마가 38살이 되면, 7살인 자신도 5살이 되고 말 거라는 위기의식 때문이었으리라. 소중하고 소중한 두 살을 그냥 앉아서 뺏길 수는 없다는 아이의 진지한 결의가 눈빛과 목소리에서부터 느껴졌다.
나이란 무엇인가?
아이의 말을 듣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라는 게 도대체 무얼까. 무심코 한 살 한 살 먹다 보니 벌써 서른 그릇도 훌쩍 넘었다. 솔직히 30대 후반의 나에게 나이는 예전처럼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20대까지만 해도 연초가 되면 새로 한 살 더 먹었다는 현타가 제법 왔었는데, 언제부턴가 나이 먹는 것에 무감각해진 거다.
내 생일보다 아이 생일을 챙기고, 내 나이보다 아이의 개월 수를 세면서 자연스럽게 잊혔던 것도 같다. 뭐 사실 서른여덟이면 어떻고 마흔이면 어떤가. 스물아홉에 느꼈던 서른의 무게와 비교해 볼 때, 서른아홉에 느끼는 마흔의 무게는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다. 오히려 나도 하루빨리 '불혹'이라는 나이가 되어 어디에도 쉽게 미혹되지 않고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데 이제 겨우 떡국 다섯 그릇을 먹은 아이에게 나이는 자신이 '자라고 있다는 증거이자 성취고 전재산'이다. 하루라도 빨리 한 살을 더 먹어서 유치원 형님반에 가고 싶고, 빨리 초등학생 형아가 되고 싶은 간절함이다. 그래서 새 학기 첫날이 몇 밤 남았느냐고 한참 전부터 엄마에게 묻고 작은 손가락을 한 밤 한 밤 꼽아가며 기대해 온 것이다.
나도 그랬을까? 나도 어렸을 땐 빨리 키 큰 언니가 되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근데 막상 진짜 어른이 되고 나서는 나이 한 살의 소중함을 잊어버렸다. 한때 나의 성장을 보여주는 확실한 지표였던 나이는 어느 때부턴가 소위 '나잇값'이라는 부담스러운 이름으로 다가왔다.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나이는 한 살 더 먹었는데 크게 이뤄낸 것이 없는 스스로를 보며 자괴감이 드는 때도 있었다. 그렇게 몇 살인지 더 이상 세지 않는 어른이 되어갔다.
아이의 꾸지람에 정신이 번뜩 든다. 나는 또 무엇이 부담스러워서 사십 살인 것을 인정 안 하다가 아들한테 혼이 나고 말았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시원하게 인정하련다. "그래, 나 사십 살이다!" 그리고 나이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사십 겹만큼 두꺼워진 낯짝을 당당히 쳐들고 내 40대를 열렬히 환영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