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우노트래블의 염대장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핫 한 전시회는 여의도에 위치한 더 현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앤디 워홀 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쉽게도 전 제주에 있다보니..ㅠㅠ 아직 못 가봤는데 이번에 서울에 올라가면 함 봐보려고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 도슨트 투어를 진행하면서 그곳에 전시한 앤디 워홀의 작품 <마릴린 먼로>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 앤디 워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이번에 전시회도 갈 겸 다시 한번 공부하면서 정리한 내용을 조금 전해드리고자~ 이렇게 포스팅합니다.^^
현재 제주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 시네마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중에 두 번째로 비싼 작품으로 아리라오의 김창일 컬렉터가 1990년대 초에 15만 불 주고 구매를 했다가 개인적인 이유로 그 다음 해에 30만 불에 다시 팔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지금의 아라리오 뮤지엄을 큐레이팅 하면서 키스 해링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필요성을 느껴 250만 불에.. (헉!!!) 다시 구매를 하게 된 작품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유럽 전체가 히틀러의 지배에 놓이게 되면서 설자리를 잃게 된 추상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당시 미술을 이끌던 미술가들은 결국 유럽을 떠나 그들을 받아준 뉴욕에 정착하게 됩니다. 당시 뉴욕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세계적인 도시로서 위치하고 있었지만 예술 분야에 있어서는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유럽에서 건너온 예술가들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였죠.. 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ㅎㅎ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정치적 색깔이 매우 뚜렷하였는데 거의 좌익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우익의 뉴욕 입장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술이 너무 미개했던 결국 그들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주게 되는데, 대신 이들은 뉴욕에서는 정치적 색깔을 지우도록 유도되어 뉴욕의 미술에서는 유럽에서 보았던 그런 정치적 색깔을 띠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건너온 유럽의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은 수많은 미국 예술가들이 등장하는데, 그중 가장 독보적인 존재는 잭슨 폴록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추상표현주의 또는 액션 페인팅의 창시자로 불리는 잭슨 폴록의 등장은 미국을 들끓게 만들었고 그의 영향력은 곧 미국 전체로 뻗어 나가게 됩니다. 하지만 추상표현주의도 어느덧 대학에서 가르치는 과목이 되고, 누구나 다 하는 그런 예술로 접어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갈구가 일어나게 되는데, 거기서 큰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의 영향을 받은 추상표현주의는 무의식 속에서 그림을 표현하는데 그럼 무의식 다음은??? 죽어야 하는건가요...ㅡ.,ㅡ 그래서 미술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물론 이후에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 탈회화적 추상의 프랭크 스텔라 등에 의해 변화를 가져가지만 이러한 것들은 마치 르네상스 이후 등장한 매너리즘과 같이 추상표현주의에서 변화되는 그림이지 새로운 하나의 사조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때 몇몇 예술가들은 추상표현주의의 순수 미술의 틀에서 벗어나 당시 빠르게 변화하는 미국의 모습을 지켜보며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미국의 전쟁 당시 만들어진 대량 생산 시스템을 바탕으로 폭발적인 생산량을 자랑하는데 과거에는 식민지가 있어 그들에게 팔면 됐지만... 식민지가 없었던 미국은 결국 그렇게 생산되는 소비재들을 내수사업으로 돌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의 주요 고객층이었던 40,50대 말고도 새로운 소비계층을 만들어야만 했고 그들이 바로 20,30대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제 기업들은 이 젊은이들에게 물건을 팔아야만 하였고 그들의 소비욕을 끌어올리기 위해 광고도 하고 그들의 비위도 조금 맞춰주면 조금씩 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합니다. 예술가들은 이것을 확인합니다. 지금 이 세상의 중심은 기존의 40,50대가 아니라 폭발적인 소비를 이루고 있는 20,30대라는 것을!!! 그래서 이제는 40,50대에게 팔기 위한 작품이 아닌 20,30 대가 원하는 작품들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등장한 한 인물이 오늘의 주인공인 앤디 워홀입니다.^^ 당시 광고업계에서 일하는 평범한 미술가였던 그에게 재스퍼 존스와 라우센버그는 너무나도 큰 벽이었습니다. 그는 고민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토록 대담한 화가의 유명세에 뒤지지 않는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까?
1960년에 워홀은 코카콜라병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화가들은 코카콜라라는 브랜드 이름과 콜라병을 작품의 일부로 다루었지만 워홀은 오로지 콜라 병만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 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썩 훌륭한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이유는 지나치게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워홀은 이 작품 밑그림에 슬쩍 붓을 댔습니다. 그의 작은 붓질 속에는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러한 그의 작은 행동으로 객관적인 이미지가 될 수 있었던 작품은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어떤 것을 그리면 좋을지 물어보던 워홀은 한 사람의 제안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달러짜리 지폐, 풍선껌 처럼 그가 발견할 수 있는 대중문화의 가장 흔한 사물들을 선택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습니다. 재스퍼 존스가 너무 익숙한 나머지 모두가 눈여겨보지 않는 주제를 선택했다면 워홀은 그와는 반대로 이미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매우 유명한 이미지를 골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식사를 하면서 적당한 '대중적' 모티브를 구상할 계획으로 어머니 집에 찾아갔는데, 그때 그 앞에 차려진 것은 빵 한 조각, 그리고 캠벨 수프 깡통 하나였는데 그가 20년 동안 먹어왔던 메뉴였습니다. 워홀에 눈에는 그 20년간 보았던 캠벨 수프 깡통이 크게 다가왔고 그는 그것을 표현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뉴욕의 갤러리 중에서는 워홀의 작품을 전시하겠다고 나서는 곳이 없었지만, LA는 달랐습니다. 1962년 7월 LA에 위치한 어빙 블룸이 운영하는 페루스 갤러리에서 앤디 워홀의 <캠벨수프 깡통(1962)> 서른두 점을 전시하게 됩니다. 어빙 블룸은 재치를 발휘해 하얀 선반 위에 작품들을 줄지어 전시했습니다. 그러자 수프 캔들은 식료품점에서 판매 중인 상품처럼 보였습니다. 당시 작품마다 100달러라는 가격을 책정했지만, 전시회가 끝날 때까지 팔린 작품은 고작 5점이었다고 합니다. 이 무렵 블룸은 깡통 그림 여러 점을 모아놓고 보는 쪽을 선호하였고 이 시리즈가 각각의 작품보다는 묶음으로서 더욱 효과를 발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워홀에게 서른두 점을 한 점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고, 워홀 역시 그의 주장을 받아들입니다. 이로써 블룸은 20세기 가장 유명한 작품인 <캠벨수프 깡통>의 공동 창작자가 됩니다.ㅎㅎ
워홀의 승낙을 받은 블룸은 앞서 팔려나간 <캠벨수프 깡통> 5점을 다시 사들이기로 합니다. 판매대금을 돌려주는 과정에서 블룸은 상당한 고충을 겪었다고 하지만 그만한 공을 들일만한 작업이었습니다. 다시 하나가 된 <캠벨수프 깡통>은 워홀을 예술가로 정의 내린 것은 물론 팝아트 자체, 그리고 이 운동의 가장 큰 특징으로 서 대량생산과 소비문화에 대한 강박을 정의하였습니다.
이로써 워홀은 작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증거들을 전부 없애는 데에 성공하게 됩니다. 32개의 깡통에는 세련미도, 과시하려는 장식적 요소도 없고 작가의 손길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무감한 냉담함을 담아낸 것이 작품의 장점이었습니다. 깡통의 반복성은 현대 광고의 방식을 흉내 낸 것으로 현대 광고는 다량으로 복제한 똑같은 이미지로 대중의 의식을 파고들어 그들을 세뇌하고 설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동시에 워홀은 <캠벨수프 깡통>에서 치밀한 통일성을 추구하면서 '예술은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에 도전하였습니다. 모두 똑같은 모양의 깡통은 경제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희소성과 독창성에 가치를 두는 전통적인 미술 시장에 대한 반기였습니다.
워홀이 특히 강조한 것은 작품을 제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32개의 <캠벨수프 깡통>은 얼핏 다 똑같은 모양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부 다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깡통을 칠한 붓 자국이 제각각입니다. 그리고 좀 더 면밀히 관찰해보면 라벨의 디자인마다 변화를 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심하게 반복되는 듯 보이는 모티브 이면에는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개인, 곧 작가의 손길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앤디 워홀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유명 인사를 이용한 작품들이 많은데(마오쩌둥, 체게바라, 마릴린 먼로 등) 앤디 워홀은 유명 인사들이 대중들의 소모품처럼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모습보다는 겉으로 만들어지니 이미지를 사고파는 유명 인사들이야말로 그의 작품 소재로 안성맞춤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그는 특히 '죽음'에 대한 집착이 컸다고 합니다. 1962년 마릴린 먼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앤디 워홀은 바로 그녀를 작품으로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마릴린 먼로 이면화>는 먼로가 세상을 떠는 1962년에 나온 작품으로 워홀이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이용해 제작한 작품 중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됩니다. 실크스크린 기법은 일반적인 상업용 인쇄술이었는데, 워홀은 이를 순수미술에 처음으로 도입합니다. 고유한 예술적 스타일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나아가는 영광스러운 마지막 걸음이었습니다. 이미 워홀은 미국 소비사회의 시각적 언어를 모방하면서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다져나가는 중이었습니다. 그가 빌려온 이미지는 다시금 다양한 의미를 띠게 되었습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간섭을 없애 '조립공정'처럼 보이는 효과를 더하는 것이 워홀의 목표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미지, 새 상품, 모방작 사이의 간극을 좁힐 수 있었습니다. 이를 위한 방법이자 그 이상의 효과를 내는 것이 실크스크린 기법이었습니다.
<마릴린 먼로 이면화>는 먼로가 영화 <나이아가라(1953)>를 촬영할 당시 찍은 홍보용 사진을 이용해 첫선을 보였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실크스크린 기법은 똑같은 이미지를 얻을 수는 있지만, 조금씩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면서도 불확실한 작업이었다. 작업을 할 때마다 스릴을 느꼈다." 과거의 뒤샹,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착안한 즉흥성과 우연성의 결합으로 빚어지는 효과 여기에 반복되는 작업과 유명인에 대한 워홀의 애정이 더해집니다.
두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마릴린 먼로 이면화>는 각각 원본 사진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25장씩 찍어낸 이미지로 구성되었습니다. 왼쪽 패널에는 주황색 배경과 대조를 이루는 금발에 자주색 얼굴의 먼로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완벽한 아름다움과 행복이 공존하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세상인듯합니다. 이는 영화계의 인사들과 대중잡지 편집자들이 만들어 놓은 먼로라는 인물에 대한 환상을 압축한 이미지입니다. 오른쪽도 같은 원본을 이용해 찍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 왼쪽의 먼로와는 달리 우울하고 고뇌에 찬 모습입니다. 흑백의 먼로는 불과 몇 주 전에 일어난 먼로의 죽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유명세에 대한 대가로 인해 결국에는 정체성과 자아의식, 생에 대한 열정까지 잃게 되는 위험한 그녀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면화는 현대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사랑스러운 은막의 여배우를 기리는 워홀의 작품에 잘 들어맞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회주의에 영합한 작품을 대표하기도 했습니다. 워홀은 먼로의 명성 그리고 그녀를 향한 대중의 애정을 작품에 이용했습니다. 약물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난 먼로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은 어느 때보다 강했습니다. 워홀을 그런 먼로를 상품화했고 그것은 분명 그녀의 죽음마저 이용한 것입니다.
1960년대 미국의 비평가들은 팝아트는 스쳐 지나가는 '일시적 놀라움', 자극적인 소재로 관객의 흥미나 끄는 '진기함의 예술'일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즉 회화, 캔버스에 깊이가 존재하지 않는 끝없이 평면성을 이루기 위한 작업만이 미술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재스퍼 존스의 <깃발>이란 작품을 통해 '평면성'의 원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회화가 굳이 추상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회화가 평면성을 위한 추상이 아닌 구상의 길을 택할 때 팝아트가 탄생합니다.
레오 스타인버스는 앤디 워홀의 화면을 '평판'이라고 불렀습니다. '평판'은 수직의 캔버스가 아니라 서류, 도면, 신문 따위가 어지럽게 널린 수평의 책상에 가깝습니다. 스타인버그의 주장에 따르면 "서구 회화는 르네상스 이래로 직립자세로 바라본 자연을 수직의 화면에 담아왔다. 이점에서 르네상스 회화와 모더니즘 회화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다. 심지어 화폭을 바닥에 깔았던 폴록마저도 여전히 그림을 그릴 때 제 작품이 벽에 걸린 채로 감상되는 상황을 상경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사의 진정한 혁명은 평판 화면의 도입을 통해 이루어졌다."라는 것이다. 스타인버그는 재스퍼 존스, 앤디 워홀의 작업은 르네상스에서 모더니즘까지의 회화적 관습에 종지부를 찍는 회화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그는 팝아트를 '포스트모던 회화'라고 불렀습니다.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체제에 맞서 자신의 철학을 관철시키려는 전복적 특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홀은 자신을 대중문화의 스타로 이해할 정도로 철저하게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적'이었습니다. 주체가 해체되고, 역사가 종언을 고하고, 정치가 사라지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조건입니다. 워홀의 첫 전시회가 열린 1962년은 모더니즘이 끝나고 '포스트모던'의 개막을 알리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