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렸을 때부터 타인과 어울리는데 상당히 고생을 하는 타입이었다.
나름 예민한 성격에 나만의 기준도 확고했던 터라, 타인과 함께 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혼자 속앓이를 하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져 나도 모르게 까칠하게 굴었다.
성격으로 인해 나는 날이 갈수록 감정적으로 메마르고 항상 뾰족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언제가 사람들하고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둘째 치고, 내가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내가 살기 위해, 나의 평화롭고 평온한 삶을 위해 내 안에 곡간을 짓고 그 속을 채워 곡간에서 인심이 나게 하기로 했다.
곡간의 인심은 물질적 여유에서도 비롯되지만,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정신적 여유였다.
처음에는 이 곡간을 짓고, 채우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내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발생하면 우선은 내 안에서 참아보고, 감정이 올라오지 못하게 누르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오히려 어느 날 외면한 감정이 폭발해 버린다는 것을 경험했다.
참고, 누르는 것은 곡간을 짓는 것도 채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후 나는 ‘사람’에 집중하기로 해보았다.
우선 문제의 중심에는 사람인 내가 있고, 내가 다루기 힘든 타인들도 ‘사람’이니, 사람에 대해 알면 조금이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 본능, 욕망 같은 것을 주제로 한 책들을 한동안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다 내가 다다른 나만의 곡간 채우는 방법은 ‘이해’이다.
상대방의 행동 동기나, 목적, 그리고 상황적 배경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만 있으면, 내가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 저 사람 입장에서는 이 상황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자기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선택이었나 보네.’라는 식으로 말이다.
따라서 내 곡간을 채우는 방식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높이려고 노력해야 하고, 이해가 감정적 평온을 해치지 못하는 수준까지 납득과 수용이 될 수 있게끔 논리적으로 잘 갈고닦아야 한다.
대체로 아래와 같이 상황을 설정해서 생각을 하면, 크게 타인에 대해서 이해 못 할 경우는 별로 없다.
‘원래 사람이란 이기적인 존재로 자기 이익이 우선이지.’
‘그 사람이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었겠지.’
‘나도 같은 상황이라면 동일한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겠지.’
‘그 사람이 이번에는 A부분은 고려하지 못했나 보네.’
남들이 나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 현실을 어떻게든 좋게 생각하기 위해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라고 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실상은 현실 도피든, 회피든 어쨌든 내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여하튼 이것이 내가 채택한 나의 생존수단이다.
더 웃긴 것은 이런 작업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넒고, 사람은 많다.
즉, 내가 생각지도 못한 상황과 사람을 새롭게 만나게 되고, 그에 따라 때로는 내가 그 외부자극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일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때로는 곡간을 확장해야 하고, 새로운 시나리오로 또다시 곡간을 채워야만 한다.
지금 예상으로는 내가 타인과 상호작용을 하고,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인지능력이 허락되는 한 곡간을 확장하고 채우는 작업은 끝임 없이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오늘의 곡간 이야기는 어머니의 한 말씀에서 촉발되었다.
“제는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애가 왜 이렇게 천하태평이 되었어”
어머니께 이 말씀을 드리며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어머니, 아니에요.
어머니 자식은 아직도 옛날 그 지랄 맞는 성격으로 소리 지르던 그 애 그대로예요.
전 조금도 성숙해지지 않았어요
그냥 좀 살고 싶어 용을 쓰다 보니 어쩌다 도인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