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안심 귀갓길”
몇 년 전 지인의 집을 방문하던 중 길바닥에 ‘여성안심 귀갓길’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문구를 보자마자 옆 사람과 나눈 얘기는 “여기 괜찮은 거야?”였다.
난 그 동네가 초행길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 하나로 이 동네는 여자들이 살기에 그렇게 좋은 곳이 아닌가 보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동시에 우려의 마음이 들어 그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이런 비슷한 일은 우리 동네에서도 있었다.
“노인 보호구역”
어느 날 퇴근하는데 ‘노인 보호구역이라는 문구가 길바닥에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린이 보호구역’은 알겠는데, ‘노인 보호구역’은 나에게 너무나 생소한 문구였다.
우리 동네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은 것 같다고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는데, 전신주와 길바닥에 새겨진 문구를 보니 이런 나의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사실 우리 동네는 교통편이 좋은 편이고, 병원, 은행, 시장을 비롯한 다양한 편의시설들이 근처에 잘 갖춰져 있어서 살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조용한 주택가 단독주택들이 도시형주택으로 바뀌고, 잠시 살다 떠나는 유형의 젊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조용함과 안정감을 추구하는 나에게 이러한 변화는 이사를 고민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계속 부모님께 이사 가는 것을 권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오랜 세월 여기에 터를 잡고 살아오신 터라 ‘이사’의 ‘이’ 자만 꺼내도 역정을 내시고는 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던 중 나타난 ‘노인 보호구역’ 표시는 갑자기 내 생각을 흔들기 시작했다.
‘노인 보호구역’ 표시는 이 동네에 노인이 실제로 많다는 것과 그것을 지역차원에서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정책을 세울 때 인구 특성을 고려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부모님들은 이 동네에 살면 부모님께 맞는 특화된 케어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동네에 나타난 표지판은 환경 단서 이론(Environmental Cues Theory)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이 동네가 어떤 곳인지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존재이다.
‘여성안심 귀갓길’은 나에게 부정적인 시그널로, ‘노인 보호구역’은 개인 사정에 기반한 긍정적인 시그널로 작용한 것이다.
이런 지역에 대한 파악은 지역 상권의 변화를 기반해서도 가능하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는 좀 있어 보이는 프랜차이즈 음식점은 없었다.
당시 우리 동네 식당들은 대부분 XX돼지 갈빗집이나 OO식당 같은 곳이 주를 이루었는데, 이 와중에 신기한 것은 KFC, 버거킹, 파파이스, 피자헛 같은 프랜차이즈는 동네에 모두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10년 정도가 지나니 스타벅스, 아웃백, 커피빈 같은 브랜드가 동네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스타벅스가 생기던 날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내가 한 생각은 ‘우리 동네에?’, ‘이동 인구가 많기는 하지만… 스타벅스 괜찮을까?’였다.
난 스타벅스가 내가 가지고 있던 우리 동네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스타벅스는 어떻게 됐을까?
지금은 정말 이렇게나 근거리에, 이렇게나 많이 생겨도 항상 자리가 모자를 정도를 호황이시다.
사실 지금은 XX돼지 갈빗집이나 OO식당, KFC, 버거킹 같은 프랜차이즈에서 스타벅스, 아웃백, 쉑쉑버거 같은 프랜차이즈로 동네를 구성하는 가게들이 변한 이유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는 아이들로 북쩍북쩍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들 수가 줄어들었고,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도시형주택이 속속 들어서면서 젊은 인구가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 동네의 인구구성 특징은 쌍봉낙타 모양으로 노인과 젊은이 두 세대가 압도적으로 메인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동네 핵심지에 젊은이들이 즐겨 소비하는 브랜드들이 들어서도 영업에 큰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 동네에는 병원의 중요한 수요자라고 할 수 있는 노인인구가 많다 보니 작은 병원들도 엄청 많다.
이렇듯 동네에 어떤 가게들이 많은 지만 봐도, 가게 구성의 변화만 알아도, 동네의 인구 구성의 특징이나 변화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혹시 이제까지 당신의 동네에 어떤 표지판들이 있는지, 어떤 가게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지 무심코 지나쳤다면, 시간 널널한 날, 날씨 화창해서 산책하기 좋은 날 동네의 표지판과 가게들을 쓱하고 한 번 훑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것만으로도 당신의 동네가 당신에게 매우 다양한 시그널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