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막대로 공간을 바꾸는 방법1

출력실을 전시장처럼. (제작연원: 2016,04,22)


바로 직전, 두 번째 글 “이삿짐 박스로 만든 디자인 차양막” 설치하기 이전의 현장이야기입니다.

한창 전시장을 꾸미며 집기들을 세팅하고 나니 좋긴 했는데, 뭔지 모를 허전함과 쐐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16평.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나만의 공간이고 아늑하여 좋긴 했지만, 뭔가 빠진 느낌이 들었고, 평소 오전엔 인지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그 느낌을 알아차리는 데는 하루 중, 정확히 오후 3시를 넘어설 때 쯤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후 2시 30분을 넘으면 조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해가 최고점을 찍고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주출입구 정반대의 창문에서 엄청난 광량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는 식겁할 정도로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150702_193720.jpg 오후 2시30분 이후 햇빛이 강하게 쏱아지는 서쪽방향 창가 (프레임설치 직후)


그건 내 생명과도 같은 벽지 출력 장비 2대와, 벽지 재단기가 달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기준, 1년 전만 해도 “노출콘크리트 벽지”라는 잘 만들어진" 나만의 킬러 콘텐츠" 하나로

재미있는 인테리어 많이 했었던, 정말 잘 나가던 공간디자인 회사 대표였습니다.)


20151103_233555.jpg 지관 설치 후, 장비를 정비하고 "노출콘크리트벽지"를 출력하는 광경 (고요한 나만의 카타르시스.)


하지만 경영 악화로 규모를 축소하고, 직원들 없이 홀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서 블라인드나

롤 스크린 설치는 당시로서는 사치라는 생각에 신문지를 유리에 덧붙여 급한 불만 꺼야 했고, 형편이

나아지면 설치하자며 현실과 타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물 주변 전봇대 옆에서 항상 박스를 쌓아놓고 고물을 수거하시는 동네 어르신의 리어카 위에서 낯익은

물건 하나를 발견합니다. (종이막대 = 정식명칭은 "종이지관".)


리어카사진 캡처.PNG 서쪽방향 창문에서 불과 10여 미터 떨어져있는 고물상 리어카


종이지관(紙管, paper tube)

종이를 여러 겹 감아 원통형으로 만든 관(管).

주로 필름, 원단, 종이 등을 감아 보관·운반하기 위한 산업용 포장재.


이따금 사무실이나 학원 인테리어 현장에서 쓰고 남은 칸막이 자재(메탈스터드+런너) 같은 자투리

철제들을 따로 모아서 자루에 담아, 어르신이 안 계실 때 리어카 위에 살짝 올려놓곤 했기에

어느새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저 리어카 위에 있는 종이지관은 어디서 가져오시는 거예요?"


“아, 저거요?

저~어기, 큰길가 앞 건물 지하에 블라인드 공장이 있는데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치워줘요.”


“그럼 사장님, 저 이거 필요한데 저한테 파시면 안 될까요?”


“헤헤, 아니에요...

사장님이 가끔 저 없을 때, 리어카 위에 철제나 전선 같은 고물 올려놓고 가는 거 알아요.

필요하면 그냥 가져다 쓰세요. 그 정도는 드릴 수 있어요.”


“아니에요, 사장님. 저 많이 쓸 것 같아요.

나오는 대로 저한테 다 주세요. 얼마씩 쳐 드리면 될까요?”


“아니, 이걸 뭐에 쓰려고 하는지 원… (살짝 내 눈치를 보시고 말을 흐리시면서...)

그러 엄~ 으음~~, 개당 350원씩 쳐 주셨으면 좋겠는데...”


“네, 그럴게요 !”

그럼 이거 10개가 조금 넘는데, 너무 훼손된 건 못 쓰니까

여기 3,500원에 10개 가져갈게요.” 감사합니다...ㅎㅎ


(사실 잔돈의 가치가 많이 떨어져 4,000원을 다 드려도, 저는 원하는 물건을 얻은 기쁨에 충분했지만

거스름 돈 "500원은 사장님 자존심"을 위해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며 거슬러 받았습니다.)


이로써 “두 번째 나의 킬러 콘텐츠”가 될 수 있는 디자인 소재에 대한 공급처 확보와 고정적인 물량 공급까지, 1차 현금 거래’를 시작으로 한, 구두상의 MOU가 체결되었습니다. …ㅎㅎ


사실 저는 이 ‘종이로 만든 지관’이라는 소재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께서 가죽이나 원단을 사 오시면 어김없이 한 롤에 하나씩 끼워져 있던,

그 시절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칼싸움 놀이 최고의 장난감이자, 때로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엄마 손에 들려 있던 ‘사랑의 매’를 가장한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습니다...ㅎㅎ


이때 고물상 어르신께 구입한 지관을 보니 어릴 적 내가 알던 지관은

제목 그대로 종이막대에 불과할 정도로 근본부터 달랐습니다.

(외경 85파이, 길이 2,800mm 이상)


이 치수를 확인하는 순간,

사무실이나 학원 공사에 얼마든지 응용 가능한 규격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구축 건물은 천장고가 약 2,400mm, 신축 빌딩은 약 2,700mm 이였기에

저에게는 경쟁 업체들이 전혀 알 길 없는 ‘꿈의 신소재’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우선,

나의 공간에서 ‘내 직관이 맞는지’를 실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

가장 급한 햇빛에 노출된 창틀에 잘라서 배치해 보니,

출력 장비들이 하나의 오브제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와 이건 뭐 !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20160422_183529.jpg 프로젝트 창, 상단 커튼월"페어유리" 전면에 세운 지관, 고물상 큰 지관 1개를 4등분으로 컷팅하여 세팅 함.


20160425_214238.jpg 가장 좋은 위치에 벽지 재단기를 안착하니, 상단 종이지관의 "젠 스타일"이 주변을 차분하게 정리해주는 느낌입니다.


두 번째,

맞은편 아파트 창에서 전시장 내부가 들여다보이던 창 쪽에 수직으로 세워 보았더니

(기막힌 시선 차단 효과와 함께 제법 멋진 조형물이 되어주었습니다.)


20160712_161457_020.jpg 바로 옆 학교에서 버리는 오르간을 배치하니 보는 각도에따라, 마치 파이프 오르간처럼 보이는 착시현상도 생겼으며.


20160503_143617.jpg 기분에 따라 디스플레이를 바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면, 가끔 찾는 지인들이 가장 좋아하던 자리였고.


20160502_210758.jpg 한달에 두세번 쯤은 밴드를 통해서, 30여년만에 만난 국민학교 동찰들과의 작은 모임이 이뤄졌고.


KakaoTalk_20251218_152217392.jpg 제 생일파티도 당연 이 공간이며, 현재 아들녀석은 저 보다 한뼘 쯤은 키가 더 컷고, 전 20KG 을 뺀 상태로 슬림 하답니다.


하지만 새로운 소재의 가능성을 실제 현장에 적용하려면 ‘종이를 건축 소재'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인식을 바꿔줄 나만의 기준"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조금 더 전문적으로 분석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종이지관은 “장·단점”이 뚜렷했습니다.


생각보다 강했고,

잘 만든 지관은 저가 MDF(중밀도 섬유재 합판)보다 밀도가 높았습니다.

(감각이 아닌, 직접 잘라보고 세워보고 눌러보며 얻은 결론입니다.)


기존 목공 장비로 손쉽게 재단·가공이 가능했고 종이의 조직들이 뭉쳐져 현장 청소 시

용이하고, 또한 몸에 해롭게 느껴질만한 미세분진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내 디스플레이 및 인테리어 작업 환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장점입니다.)


하지만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종이지관은 MDF(중밀도 섬유재 합판)처럼 수축과 팽창이 크고,

특히 장마철에는 그 팽창률이 눈에 띌 정도였습니다.

(형태 유지를 위해 수축·팽창률 계산 등 설치 과정에서 반드시 신경 써야 할 부분입니다.)


원통형이라는 특성상 일반 각재처럼 자유로운 형태 구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는 표현의 제약이 있지만 ‘어디까지 써야 하는지’를 명확히 정해주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방법”이었습니다.


국내 소방법은

유독가스 발생 여부보다 화재 시, 번짐을 얼마나 늦출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봅니다.

이는 생명을 좌우하는 화재현장의 탈출시 골든타임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에서 종이지관은 사용 수량과 면적에 분명한 법적 제약이 따릅니다.)


이렇게 요소별로 정리하고 나니

대중적인 소재로 쓰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조금만 더 다듬으면

나만의 특화된 공간 디자인 소재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장비 보호를 위해

최소 50만 원 가까운 비용을 들여 암막 롤 스크린을 설치해야 했던 공간은

단돈 3,500원으로 ‘임시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새로운 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고물상 사장님의 꾸준한 공급 덕분에 깨끗하고 반듯한 지관들을 선별해 모을 수 있었고,

이 지관들은 곧 동대문구 전농동에 위치한 공방 인테리어의 메인 소재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종이지관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게 된, 공방 인테리어 이야기를 이어가 보려 합니다.

(당시의 반응으로 이 종이막대가 인테리어 현장의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추신)

이 기록은 2016년 4월 22일에 설치한 소재에 대한 이야기이며,

2025년 12월18일에 다시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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