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로서의 사교육 이야기 #4
열일곱에 처음 만났던 A 감독은 스물둘의 나를 보고 "자기를 배격하지 않을 대학에 교묘하게 잘 스며들어 누가 봐도 '넌 분명히 그런 걸 공부하겠지'라는 걸 공부하고 있는 저 친구"라고 말했다. 말에 담긴 함의를 골똘히 생각하기도 전에, 좋아하는 어른이 내게 보여준 관심이 즐거워 나는 기뻤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어처구니가 없다. 대체 난 왜 기뻐한 거야. 감독님의 말을 줄이면 결국 '성장하지 않은 촌스러운 사람'이라는 것 아닌가.
나는 '사회학도'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장엄함이 좋았다. 단지 그것만을 원했으므로 전공이었던 사회학이 뭔지는 아직까지 알지 못한다. 학부 3학년 때는 학생회장이 되었다. 역시나 그 이름이 주는 장엄함만을 바랐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하지 않았다. 그 비루했던 시기를 구태여 말하진 않으련다. 체면치레나 하려고 학기 말에는 감독께 학생회 강연을 청했다. 감사하게도 굳이 응해주셨다.
감독님의 명성 덕에 자리가 금방 찼다. 앞서 언급한 문장으로 우리의 조막만한 인연을 간략히 설명한 후 강연을 시작하셨다. 강연은 '연소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술을 먹고 싶어 안달했다.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과는 술을 마셔야 한다. 뒤풀이 오실 거죠오? 강요에 가까운 질문으로 감독님을 겨우 술자리에 앉혔다. 감독님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곧 다른 학생들이 자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알고 보니 감독을 보려고 일부러 찾아온 타학교 학생들이었다. 노골적으로 팬심을 드러내 보이는 학생들을 감독께선 적당한 템포로 응대했다. 그러나 팬심의 수위가 자꾸 높아졌다. 이곳은 팬싸인회가 아니라 술자리였으므로 팬들은 금방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팬과 아이돌 사이의 장벽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겨울이 오고 있다. 그러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감독님이랑 친구 해도 돼요?"
순간 "저도요!"라고 할 뻔했다. 감독님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반말은 해도 돼. 근데 친구는 안 돼."
얼큰해진 나는 여하간 그것이 거절의 의미라는 것까지는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날의 모든 대화를 잊어버린 지금, 그 문장만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떠돌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헛된 권위를 고집할 생각은 없어. 그러나 우리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과 예의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어.'
무례함을 허물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자들에게 저리 단호하고도 우아하게 답하는 어른을, 지금까지도 나는 본 적이 없다.
----
무례함은 나의 힘이다. 예의라는 단어를 '순응' 정도로 여길 때였다. 예의라는 단어의 흔한 용례란 "이런 예의 없는 것들" 같은 하대가 아닌가. 이때 예의란 어떠한 종류의 비판도 걸러내는 반동적 규범이다. "옳은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예의가 있어야지, 어린 새끼가." 그러므로 무례함은 갑질의 세계로부터 나를 지키는 무기다. “응, 너나 잘하세요.”
그러므로 당신이 틀렸다는 걸 말하기 위해 무례해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지혜 있는 사람이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볼테르의 이 말을 나는 믿었으므로. 여전히 이 말이 모두 틀렸다고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 말을 오용하고 살았던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나는 장엄했다. 좋은 말로는 진지한 거였고, 더 정확한 말로는 무례한 거였다. 내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은 '적'이라고,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쉽게 '동지'라고 여겼다. 내 진보주의적 신념을 관철하기 위한 모든 시도가 틀렸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좋은 사람들을 함부로 '동지'라 칭했던 것은 사실 그들과 동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쉬이 무례해지는 것이 분명 설득의 기술은 아니다. 나는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무례함을 믿는 광신자였다. 나를 지킨다는 이유로 무례함을 저질렀던 많은 순간에서, 나의 무례함은 앞으로 함께 할 '동지'로 상대를 설득해내기보단 적으로나 돌리는 데에 시종했다.
볼테르가 한 말의 핵심은 실로 앞절에 있었다. "광신자의 열성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예의라는 것이 상대에게 다가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심스러움이라는 걸 깨닫지 못해 망쳐버린 많은 인연을 떠올린다. 그러나 반성은 언제나 후회를 전제한다. 이미 헤어진 사람들의 이름들을 이제서야 망연히 매만질 따름이다.
----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국어 강사로 일하면서 윤동주의 시를 대체 몇 번이나 읊어댔을까. 그것이 지겨워 나는 학생들에게 매번 농담한다. “자아 성찰을 이렇게나 많이 하실 거면 그냥 만주 가서 독립운동을 하시지.” 한 명이라도 피식거리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민족 시인이 가졌던 번민의 무게를 값싸게 판다. 그러나 그 누구도 졸음을 깨지 않는다.
하물며 내 자아 성찰의 무게야. 나는 무얼 바라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뭐긴 뭐야, 밥벌이지. 내 무례함이 진정 치명적이었던 것은 운동movement의 과정이 아니라 학원 생활에서였다. 동지들은 나의 무례함을 못 본 체 해주었다. 클라이언트들은 내게 굳이 그런 배려를 베풀 필요가 없었다.
자기반성은 언제 하는가. 한 대 세게 맞았을 때나 하는 것이다. 어, 덤비지 말걸. 장엄하게 학생을 꾸짖었다 싶으면 학생은 여지없이 학원을 끊었다. 학부모들의 항의 연락이야, 이젠 뭐. 당신 자식이 공부 안 하는 걸 나보고 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전화를 받을 때마다 이런 말들이 머릿속에 부단히 맴돌았지만, 다음 달 월급 명세서를 생각할 때면 금세 예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네, 네, 너무 죄송합니다. 그럼요, 학생이 괜찮아지면 학원 보내주세요. 제가 학생이랑 상담해보겠습니다. 네, 네, 들어가세요.
이런 날이면 나는 생각한다. 나는 다만 무얼 바라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그래도 근 몇 년간 이곳에서 밥벌이하고 있으니 이제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친절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것이 밥벌이의 지겨움 속에서 익힌 스킬이었을지언정 어쨌든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거다. 클라이언트와 업자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도 너무 무례하지는 않게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거다.
반말은 해도 친구는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는 왜 그리 살지 못했던 걸까. 결국 도달하는 곳은 미적지근한 자기반성의 영역이다. 기껏 윤동주 농담을 해놓고 언제나 후회한다. “그래도 치열한 자아 성찰이 결국 민족의식과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된 거겠지.” 농담 끝에 이런 진지한 말을 덧붙이고 안 그래도 실패한 농담은 더욱 처참해진다. 내 반성 끝에 남은 건 결국, 실패한 농담뿐이다.
강연 뒤풀이 자리에서 나와 감독님께 강연료를 건넸더니 정색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이 돈 주면 앞으로 너 다시는 안 본다." 마땅히 받을 돈에 대해 그리 말하니, 마치 내가 죄진 양 쭈뼛거리게 되었다. 이거 안 받으시면 제가 횡령한 게 돼요. 그건 모르겠고, 주지 마. 감독님은 금세 택시를 타고 가버리셨다. 돌아와 보니 이미 술값도 다 계산돼 있었다.
그것이 감독님을 뵌 마지막이었다. 어차피 못 뵐 거, 그때 돈이나 드릴걸. 감독님은 바쁘고 나는 한가한 사람이니, 그날의 일을 혼자서 오래도록 생각해본다. 돈 준다는데 뭘 그리 화를 내셨을까. 밥벌이하고 있는 지금에서야 그 뜻을 삐뚤게 알아챈다. 나는 널 밥벌이를 매개로 만나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 같은 거 아니었을까. 물론 물어보질 못하니 알 길은 없다. 그냥 혼자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보다 조금 더 덜 무례한 사람이 되었는지 확인받고 싶은데. 다시 뵐 수 있게 된다면 지금껏 범한 무례를 사과하고 싶다. 감독님뿐만 아니라 나의 친애하는 모든 적들에게. 그러나 그조차도 이제 허락되는 건 아닐 테니, 다만 나는 학생들에게나 말할 뿐이다.
얘들아, 잊지 마. 윤동주는 자아 성찰의 시인,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은 사람이다. 독립, 홀로 선다는 것 말이다. 여러분들은 나처럼 틀리지 말길 바란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졸음을 깨지 않는다. 나는 익숙하게 다음 진도로 넘어간다.
----
*나도 이게 아무 의미 없는 글이라는 걸 안다. 근데 또 그럼 어떤가. 다들 너무 의미 있는 글들을 생산한다. 그것이 피곤해 계속 도망치고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