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시형의 장례식에 부쳐
아버지를 멀리 보내드리고 왔다. 병상에 누운 지 10여 개월 만이다. 굴곡진 생이었다.
본받을 만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밀폐된 방에서 하루 세 갑씩 담배를 피워대던 아비 탓에,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하지도 않은 흡연을 추궁당하곤 했다. 밥벌이하는 엄마가 저녁 늦게 귀가할 때면, 제 분을 못 이긴 아비의 주먹이 내게 날아들었다. 공포에 젖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을 빌던 내 모습이, 유년을 떠올릴 때면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IMF 이후 제대로 된 직장을 가질 수 없었던 스트레스를, 아비는 술에 취해 주변 사람을 때리거나 집안 살림을 박살내는 것으로 풀었다. 반쯤 부서진 TV, 너덜너덜해진 문짝, 곳곳이 깨져 있던 유리창들이 내 기억 속에 남은 고향 집의 풍경이다.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겠다는 의지를 품게 된 것도 반절 이상은 난폭했던 아비 덕(?)이었다. 나에게는 유일하나 동세대 노동 계급의 가정이라면 흔히 있을 법한, 뭐 그런 얘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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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으로 미워만 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깔끔했을 텐데. 내가 이십 대 중반이던 무렵, 유방암 4기 판정을 받은 엄마를 요양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온 날에 아비는 쏟아내듯 자신의 생애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조리없고 어눌한 말투로 거짓부렁만 일삼던 사람이, 술 한 모금없이 참회하듯 그동안의 거짓을 교정했다.
사실 자신은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고, 동네 건달들과 어울리며 한강 모래사장의 모래를 훔쳐 팔거나 양공주들을 지켜주는 대가로 미군 PX의 밀주를 받아 암시장에 내다 팔며 청춘을 보냈다고. 그러다 휘말린 패싸움 중에 누군가 휘두른 낫에 머리를 찍혀 평생의 뇌질환을 갖게 되었다고. 이후 운 좋게 시험에 붙어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월급보다 많은 돈을 하룻밤 술자리에서 받을 수 있는 걸 알게 되어 거리낌없이 뇌물을 받았다고. 그러다 걸려 결국 공무원에서 짤린 후 그동안 모은 돈으로 차린 봉제 공장 역시 망해버리고 말았다고. 죽으려고 한강에 뛰어들었으나 어릴 적부터 다져놓은 수영 실력이 결국 아비를 강가로 끌어내었고, 망한 삶을 수습해보려 당시 울산에서 살고 있던 고모집에 내려가 막일을 하다가 엄마를 만나게 된 바람에 울산에 자리 잡은 것이 이젠 서울서 나고 자란 세월보다 더 길어졌다고.
그 긴 시간을 살았어도 여전히 서걱거리는 울산이라는 객지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아는 엄마를 잃게 된다면 결국 자기 자신마저 잃게 된다고 생각했을까. 생의 흠이라고 생각하여 자체적으로 편집한 얘기까지도 아빠는 그날 내게 다 털어놓았다. 아니, 그날만은 아니고 그때를 기점으로 차근차근 얘기를 보태었던 것 같다.
물론 아빠에 대한 나의 깊은 원망은 이런 인생 얘기 몇 구절로 해결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를 정말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실은 달리 방법도 없었겠지만, 그동안의 아빠와는 어울리지 않는 착실한 생활을 그때부터 해나가기 시작했다. 엄마의 완치 판정 이후엔 꼭두새벽에 출근하여 공사장에서 중장비를 몰고, 오후에 퇴근해서는 엄마와 강변을 산책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평범한 중년 부부의 삶을 살았다.
서울 사는 아들에게 폐가 될까 간헐적인 통화 끝엔 언제나 "울산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덧붙였고, 자그마한 텃밭에서 기른 상추며 수박 같은 것들을 아들집에 꼬박꼬박 부치곤 했다. 그렇게 애지중지 뭔가를 키우다가도 '아버님이 보내준 방울토마토가 맛있었다'는 며느리의 말 한 마디에 텃밭을 죄 뒤엎곤 한가득 방울토마토 씨앗을 뿌려 그것들만 보내주기를 기다렸다. 비록 우리가 먹은 아빠의 방울토마토는 그게 마지막이었으나.
이런 날들이 부모가 같이 산 근 40년의 시간 중 4~5년이나 될까. 엄마는 그때를 '행복했다'고 일컬었다. 나는 그게 아빠가 나와 엄마에게 하는 속죄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허락한 것이다, 아빠의 갱생을. 그러나 아빠는 곧 쓰러져버렸다. 엄마에게 패배한 암세포는 대신 아빠를 굴복시켰다. 내가 준 갱생의 기회를 이렇게 박차고 떠나버리다니. 미워만 하기에도, 슬퍼만 하기에도 이젠 모두 애매하게 되었다. 끝까지 이렇게 망치고 들다니, 마음에 들지 않아. 조문객들이 다 가버린 새벽에 아빠를 보면서 홀로 맥주 한 캔을 비웠다. 사진 속의 아빠는 속없이 웃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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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태어난 1956년생 이시형의 인생을 풀스토리로 떠들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내가 유일하다. 그러니 이렇게 쓴다. 아빠는 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이제 나는 할 수 있다.
이렇게나 내가 자랐다. 그걸 알고는 있었나. 참으로 아둔했던 아빠. 나를 만든 가족을 내가 만든 가족들이 함께 보내주었다. 이만한 송별이면 아빠의 분수엔 차고 넘친다.
우린 행복하게 살 것이다. 실은 이미 그렇다. 아빠가 어릴 적 내게 선사한 불행은 결코 나를 잡아먹지 못했다. 이처럼 통렬한 복수가 어디 있으랴. 그러니 천국까지 부지런히 달려라, 아비.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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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한 일을 치르는 데에 수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천창수 울산광역시교육감님, 변영주 감독님, 이재강 국회의원님, 김태선 국회의원님, 김동아 국회의원님, 김승원 국회의원님, 금태섭 전 국회의원님, 장혜영 전 국회의원님, 황세영 전 울산광역시의회 의장님, 오경석 두나무 대표이사님, 서한솔 공공운수노조 연대사업부장님, 이아라 아라국어논술 원장님, 김인호 현성테크 대표님, 의주로교회 성도님들, 성공회대학교 총동문회,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11학번 동기들,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14대 학생회 민낯 집행부원 등 여러 분들께서 마음을 보태주었습니다. 일가친척들이 제가 잘 살았다고 착각하시는 데에 여러분들의 기여가 매우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동료 류호정, 조성주, 이병진, 염종운, 김창인, 이영봉, 친구 순호, 소현, 한이, 은애, 솔이, 혜린, 효규, 나리 등 많은 사람들이 난생 처음으로 울산이라는 먼 동네까지 와서는 저와 밤낮을 함께 지새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붙들지 않아주셨으면 일찌감치 식장에서 도망쳐 버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보다 더 많은 분들이 연락해주시고 몸과 마음을 보태주셨습니다. 사실 제 삶의 터전에선 이미 동떨어진 곳에서 식을 치러야 했는데 제 예상을 지극히 넘긴 수준으로 식장이 북적였습니다. 아빠는 이걸 부러워 했을까요, 대견해 했을까요. 나중에 물어봐야겠습니다.
밥벌이가 궁해 주말 수업을 해야하는지라 급히 또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보내주신 마음들에 다 답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우선 식을 무사히 치렀다는 말씀을 드리고, 차근차근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저의 몸은 이미 여러분의 것, 각종 경조사에 무한정 이용해주시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재랑, 그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