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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월과 팔월 Aug 06. 2015

2014년 11월 10일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2014년 11월 10일.


처음으로 쓰는 글...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도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두 달 전 장례를 치른  후 단 하루도 어머니에 관해 떠올린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지난 두 달 내 사랑하는 어머니를 아예 잊고 지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일부러 어머니에 관해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기 때문이 아니다. 늘 어머니를 생각했고, 떠올리려 노력했다. 심지어 꿈에서라도 한번 뵙길 바랬다. 그렇지만 어머니에 관해서는 어떤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서 어머니에 관한 모든 것이 고스란히 다 삭제된 탓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과거의 아프고 힘든 기억을 잊어버린다(혹은 잊어버리게 한다)는 말이 있다. 나도 이와 비슷한 경우인 것 같다. 사실 아직까지도 나는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마음 아프고 슬프다. 그 때문일까... 어머니를 떠올리려 핸드폰의 사진첩을 보고, 어릴적 앨범을 꺼내보기도하고, 녹화한 비디오 테잎을 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어머니를 떠올릴 수 없었다. 심지어 꿈에서도 어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아직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아프기 때문일까.. 아직까지도 내 몸은  삭제된 기억들을 복구하려고 하지 않고 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러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평생 떠올릴 수 없으면 안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글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기록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단 나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암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해서 말이다.  


정말 그 많던 기억과 추억들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어제  살아 생전 어머니께서 치료를 받으시던 암센터를 찾았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어머니가 한 달가량 묵으셨던 병실 앞에 섰었다. 어머니는 작년 12월 목 주위 굴욕종(근육암) 수술을 받고, 이 병실에 꼬박 한 달 동안 입원해 계셨었다. (암센터는 2002년부터 12년간 다녔다)


그 병실로 올라가는 동안 나는 잠시나마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착각을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병실 복도를 지나 병실의 문을 열면 늘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어머니는 없었다. 대신 불 꺼진 침실 그리고 어머니가 아닌 다른 환자분께서 계시다. 사실 장례를 치르고 온 직후엔 한동안 어머니가 다른 세상으로 갔다는 실감이 전혀 들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기 전 한 달가량을 호스피스 병동에서 묵으셨기 때문일까.. 이미 장례를 치르고 와서도 비워진지 한 달도 더 지난 어머니의 빈방을 보면서 문득 어머니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계시니까 얼른 아침을 먹고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늘 들었다. (마음의 관성이 참 무서운 것이란 생각을 한다.) 여하튼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까..  암센터에 오면 어머니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혹은 최소한 어머니에 대해서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찾아왔지만  당연히 어머니를 볼 수 없었다.

불꺼진 병원의 복도. 저녁 일찍 불이 꺼진다.

심지어 어머니께서 있던 병동 앞 1m 에서 더 이상 한걸음도 더 가까이 다가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굳이 어머니가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용기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어미니를 보내 드릴 준비가 되지 않았나 보다.)


 사실 이 암센터의 공간은 단순히 병원 이상의 공간이다.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찾은 암센터의 공간은 절박함의 공간이었다. 최초 암 진단에서부터 특히 재발 판정을 받고 다시 오게 된 암센터.. 그 마음의 무게와 삶의 비통함을 아직 난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단 이 공간이 한없이 어두운 곳은 아니다. 사실 치료가 시작되면서부터는 암센터는 사실 희망의 공간이기도 했다. 비록 절망감과 비통함을 안고 찾아왔지만 사실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이 곳에서 늘 희망을 찾고 또 발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난 늘 어머니께 말했었다.. 언젠가 병이 완치되면 저 멀리 남국으로 놀러 가자며 내년 겨울엔 추위를 피해서 따뜻한 적도 아래의 나라로 놀러 가자며.. (물론 그러지는 못했다.)


어머니와 내가 늘 선생님을 기다리던 곳.. 혈액종양센터 혈앞계 앞 마지막 줄 그곳을 지났다. 정신과 앞 두 번째 벤치.. 병원에 막 도착해 나는 아메리카노를 어머니는 두유와 과일을 드시던 곳 또한 지났다. 2층 진료비 납부 벤치.. 어머니 진료를 끝내고 내가 얼른 번호표를 뽑으러 뛰어 가던 곳도 지났다. 이제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1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 앞이다.


 이 모든 곳에서 어머니와 나는 사실 어제 맛있게 먹은 카레이야기부터 병원 오던 길에 싸게 팔던 햇감자 판매아저씨 이야기 등 소소한 이야기부터 가끔 내 졸업 후 진로, 어머니 병세 이야기 등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까지 모든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기에 사실 지난 몇 년 간 어머니와 나의 모든 것이 담긴 공간이다. (어쩌면 집보다 더..)


이런 공간인 암센터를 다시금 찾아와 걷고 있으니 여러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정말 어디에 계실까?’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머니께서 아프시기 시작하면서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머니와 함께 오래오래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이 공간에서 절망감, 비통함, 희망감, 기대감 모든 것을 느꼈다.  그렇게 어머니와 나와의 유대의 끈을 더 단단하게 묶었던 곳이다. 그러나 이 장소의 모든 것(병원의 시설과 의사선생님과 직원분들부터 다른 환자분들과 그 가족분들 및 병원 자체가 주는 느낌 그 자체)은 그대로인데, 바뀐 것은 우리 어머니만 세상에 없고 혼자 온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기분이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머니는 정말 어디에 계신 것일까?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솔직히 이 순간 나는 어렴풋이 무언가 하나를 깨달았다. 어머니가 정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모든 것이 이토록 그대로 인채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이고, 이것은 나로 하여금 이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먹먹한 마음이 든다.


사람의 인생이란 것이 생각보다 꽤 허무한 것 같다. 떠나고 난 자리에 남는 것은 떠났다는 사실 외엔 사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어머니의 무엇이 세상에 남아있는 것일까? 꽤 오랫동안 이 질문을 던져왔지만 사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그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장소에 다시 방문해서 한 가지 어렴풋한 해답을 찾은 느낌이다. 지금 내가 단 한 가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내  마음속에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했던 기억들을 모두 꺼내어 글로 기록하는 것..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따뜻한 어머니의 기운, 마음이 모두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부터 글을 쓰기로 했다. 어머니의 작은 전기를 써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생각하게 된다. 암센터에 계신 자원봉사자의 대부분은 이미 암투병 경험이 있었던 분들이 대부분인 경우로 암완치 후 후배(?) 암환자를 위해  자원봉사하시는 고마운 분들이시다. 생전에 어머니는 꼭 완치된다면 당신도 그 일을 하고 싶어 하셨다. 이 생각이 문득 든다. 그래서일까..  어머니의 그런 마음을 나의 방식으로 대신 실현드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암환자가 아니었다. 암환자의 가족이었다. 서점에 가면 암환자를 위한 책, 글들이 많다. 암환자의 가족으로서 나는 암환자를 위한 책, 가령 암환자를 위한 운동책, 암환자를 위한 식단짜기, 항암제의 진실, 방사선 치료에 도움이 되는 책, 암환자 명상법 및 마음 내려놓기 책 등.. 을 많이 읽었다. 솔직히 도움이 된 책도 있고 정말 쓸모없었던 책들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정작 갑갑했고 모든 책이 쓸모가 없다고 느꼈던 점은 암환자를 위한 책은 많지만 암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책들은 전혀 없다는 것에서 왔다.


사실 기존의 암 치료에 대한 책들은 일종의 완치 신화, 완치 영웅에 대한 책들 뿐이다. 솔직히 나도 그 책들을 읽으며 꽤 많은 희망을 얻었고, 실제 어머니와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감사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어머니의 임종으로 깨닫게 된 사실은 암환자 그리고 암환자 가족에게 있어 생존 연장이나 완치 같은 의학적 진단은 의학적인 처방을 위한 것일 뿐 이들의 삶에 있어서는 어쩌면 크게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의학적 소견, 판단, 진단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암환자의 인생이다. 그리고 가족들과의 삶과 행복이 더 중요하다.


물론 좋은 선생님들 만나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해 치료에 매진해야 하며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과정이 암환자 본인 그리고 가족에게 있어 쉽지 않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점이며 그렇기에 이 고통 때문에 암 치료의 시작부터 암환자 그리고 그 가족들의 인생이 화장되기 쉽다는 점이며 그것이 너무 안타깝다는 점이다.


나의 어머니는 첫 진단 이후 완치 판정을 받으셨었다. 그러나 인생의 감사함과 암투병으로부터의 소소한 승리감을 느끼시기도  전에 재발판정, 그것도 말기암이라는 판정을 받으셨다. 그러나 말기암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1.5년 시한부 인생을 받고도 10년이라는 기간을 더 사셨고, 반 완치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하는 것 같았지만 마지막 10개월을 병세가 악화되시며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투병의 기억만 가득할 뿐 여러 타이밍을 놓쳐 여행을 가지도 못했고, 좀 더 빨리 잘못했고 미안한 것을 말해드리지 못했고 더 빨리 어머니께 사과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그리고 조금 더 빨리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 ‘송순득씨의 인생’을 떠올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어찌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지 못한 숙제처럼 남아있는 채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을까. 몰랐기에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


초기 발병부터 임종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지나고 보니 너무 많은 것을 몰랐다. 어떻게 그리고 언제 어떤 치료를 하게 될 것이며 어떤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드는지 그리고 언제 호스피스 치료를 고려해야 하고 언제 여행을 다녀와야 하는지 후회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나는 이글을 통해 암환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일종의 마음의 지침서를 제공해주고 싶다. 그렇게 하기 위해 나는 최대한 나의 어머니에 관한 모든 기록과 기억들을 생각 나는 대로 다 쓸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암환자분과 그 가족들에게 암 투병 기간 동안 암환자가 자신의 인생을 다시 찾고, 암환자의 가족들과 소중한 시간을 가꾸기 위해서 내가 했던 여러 후회와 실수를 담아 전해드리고 싶고, 그렇게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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