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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월과 팔월 Aug 09. 2015

2014년 11월 14일

어머니를 생각하며 두 번째 글을 쓴다.

어느덧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주 어머니가 보고 싶은 마음에 이른 새벽 어머니가 계신 추모공원에 다녀오겠노라 마음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결국 새벽에 일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불효자식이라는 마음에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불효라도 해드릴 어머니가 이젠 곁에 없다는 사실이 이른 새벽부터 나를 더 슬프고 먹먹하게 했다. 동이 막 틀 때의 새벽 아침... 그 시간은 어머니의 쌀을 씻는 소리가 들리는 시간이다.. 곧 나를 깨우실 시간도 다가올 텐데 이렇게 혼자 일어났다.


매년 겨울이 오면 어머니가 내게 말하곤 하셨다. “이제 날씨가 추워지는구나.. 돈 없는 사람들이 춥고 배고픈 계절이 오는구나. 우리도 얼른 겨울 맞을 준비를 하자”  우리 어머니는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3남 4녀 자녀 중 5 번째 딸로 태어나 어릴 적(중학교에 다니실 때) 외할머니를 여의시고 홀로 6명의 자식들을 먹여 살리셨던 할아버지 아래에서 자랐다. 그렇기에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소위 자급자족적 농촌 생활을 하셨었고,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힘쓰는 일을 했다면 어머니와 이모들은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섬세한 일들을  하셨노라 말해주셨었다.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으셨던 듯 서울 도시 한 복판의 집에서 딱히 겨울 맞이 준비라 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늘 이맘때가 오면 겨울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하시곤 했다. 사실 어머니께서 살아 생전에 이 말을 하실 때면 난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요즘 같은 도시 겨울에 무슨 겨울준비가 필요하나요... 시골이라면 모를까...” 그냥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반응하던 말이었는데, 이제는 어머니 없이도 내가 그 말을 스스로 듣고 말하고 있자니 서글픈 마음이 든다.  


어머니에 대한 내 최근 기억 중 아직까지도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우리 집에서 주무시고 일어난 아침이다(그날이 어찌 집에서 주무시는 마지막 날 이었음을 알 수 있었을까...) 그날 아침 우리는 지난 봄에 새롭게 추천받은 항암제가 얼마나 효과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암센터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더 이상 어머니께 쓸 수 있는 약이 없다는 말과 함께 의학적 소견상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이 2주(혹은 그 이하로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 정도 남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곧 수일 내에 혼자서 걷지도 못하게 되실 것이고, 그 이후엔 장치 없이는 숨 쉬는 것도  힘들어질 수 있으니 하루 바삐 호스피스 시설로 옮겨 삶을 정리하고(어머니는) 임종을 준비(우리는)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보통의 진료는 대개 5분 정도안에 끝난다. 간단히 지난 경과와 현재의 경과 그리고 전반적인 건강상태 체크 후 현재 하고 있는 치료를 지속할지 혹은 새로운 치료를 해야 할지에 관한 의사선생님의 결정 정도만 듣고 나왔기 때문이다. 5년 이상 한 선생님께 진료받다 보니 오히려 일상에 대한 잡담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날 우리는 대략 10분 이상 병실에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고, 왜 어머니가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야 하며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남았으며 가족들이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를 들었다.


문제는 이 모든 이야기를 나와 이모만 직접 의사선생님께 전해 들었고, 어머니는 직접 듣지 못하셨던 것에서 왔다.  말하자면 그날은 나, 어머니, 이모님 이렇게 세명이 함께 병원을 찾았다. 진료실에 함께 들어섰을 때부터 불안한 직감이 왔었다. 지난 7년 늘 반가운 웃음으로 우리를 반기셨던 의사선생님의 표정이 꽤나 어두웠기 때문이다. 평소에 했던 따뜻한 일상에 대한 대화는 없었고(애써 외면하시는  듯했다. 선생님도 힘드셨으리라 생각한다) ‘더 이상 치료제가 없습니다’라는 무거운 첫 마디를 꺼내셨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와 이모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눈을 확인했고, 둘 다 이 대화는 어머니가 들어서는 안될 대화라는 것에 공감했었다( 한마디의 대화 없이 오로지 눈으로만). 나는 곧장 어머니 팔을 안고 진료실 밖으로 나와 근처 의자에 어머니를 앉혀놓았고 바로 진료실로 들어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 이야기를 들으시지 못했다.


얼마나 청천벽력 같은 말인가. 이제 우리 어머니가 정말 한 달 안에 세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니..  그런데 또 이 말을 어떻게 어머니께 해 드려야 할까... 언제 건 어머니께 앞으로 같이 행복하게 살자고 말했던 것은 나인데, 그리고 어떤 안 좋은 결과가 나오더라도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던 건 나인데 심지어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늘  당신은 약 없어도 살 수 있을 것이기에 걱정 말란 말만 하셨던 분인데.. 어떻게 어머니께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호스피스 시설로 들어가자 말을 할 것인가.. 실로 모든 세상이 내려 앉았었다.


 사실 병원에 가기 전부터 어머니의 수술 부위 주변으로 육안으로 관찰될만한 크기의 암세포 덩어리가 보였다. 그리고  2주 전쯤부터 스테로이드제 진통제를 먹으시기도 밤새 고통으로 밤잠을 설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 스스로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었다. 그러나 막상 더 이상 (어머니께서) 살 수 없으시단 말을 듣고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이제는 그 말을 내가 직접 엄마에게 말을 해야 한다니.. 그리고 더 슬픈 것은 내 손으로 엄마를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시켜드려야 한다니.. 모든 것이 믿어지지 않았던 날이었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고 진료실을 나와 어머니를 만났다. 우리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머니가 먼저 이런 말을 하셨었다. “나는 약이 없어도 반드시 병을 이겨내고 극복해서 살아갈 것이다. 나는 강하다. 걱정하지 마라.”며 오히려 나와 이모를 위로하려고 했다.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어머니도 충분히 짐작하셨을 텐데.. 어찌해야 할까..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의 이 말씀은 나를 더 슬픔으로 빠지게 했다. 사실 단순히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는 것이나 혹은 이제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다고 말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도 엄마처럼 나 또한 내 사랑하는 엄마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도 사랑하는 우리를 두고 그러실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정말 의사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2주 밖에 살지 못하실까? 처절하게 울부짖고 싶었지만 옆에 계신 어머니를 위해 꾹 참았다. 옆에 계신 이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듯했다. 


일단 우리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어머니 몰래 이모와 집을 나와 호스피스 병동(실) 입원을 알아봤다. 일단 여태 병원에서도 아무리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았더라도 늘 수술을 하겠거니 혹은 방사선 치료를 하겠거니 혹은 새로운 항암제를 사용하겠거니 이야기를 들으며 왔었기에 이런 상황은 정말 처음이었다. 어찌 누가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온 상황에서 온전히 차분히 준비를 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이런 마음의 준비 그리고 여러 실질적 준비도 안되었다는 것보다 병원 입원에 관련된 행정적인 부분이 더 심각했다. 일단 당장 입원할 수 있는 호스피스 병동이 없었다(서울 경기 전체에). 암센터에서는 이제 죽음이 2주 남았다며 우리를 보내며 새로운 호스피스 병원을 찾으라 했는데, 호스피스 시설에 연락하니 어디 건 당장 일주일 내에(그나마도 가장 짧은 답변이 일주일이었고, 긴 곳은 기간을 정해주지도 않았었다) 입원할 수 있는 병동이 없다고 했다.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 환자로서 오랜 병마와 싸우다 더 이상 그것이  불가능할 때 환자에게 남은 인생을 정리할 시간, 육체적 여유를 주기 위해 치료보다는 고통 완화에 집중하는 치료라고 들었다.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의 병원에서는 이런 병동을 운영했는데,  문제는 환자를 호스피스 대상자로 간주하고 입원시키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호스피스 병동 내에 환자를 받는 시스템이다 보니 다른 환자가 병실을 나가야(대부분의 경우 임종하여야) 어머니가  입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제나 알 수 없는 제도였다.

  

어머니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2주인데.. 그런데 그 곳에 들어가는 것도 일주일 내에  불가능하다니.. 대체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여태 나는 무얼 하고 살았을까.. 특히 이미 시간은 금요일 오후.. 정상적인 입원도 불가능한 시간이라 입원하시더라도 주말을 응급실에서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이 펼쳐질 줄 누가 예상했으리라... 당장이라도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하며 울고 싶었지만 잇몸을 꽉 물고, 세상 모든 병원에 다 전화하리라 다짐을 했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인맥이 닿아 호스피스 병동은 아니었지만 한 대학병원 ‘특실(특실 이어야만 했다.)’을 찾을 수 있었고, 어머니를 입원시켜드렸다. 어머니껜 당장 요 며칠 정도 입원해서 검사받을 것이 있다는 정도만 말씀드리고...(정말 어머니는 모르셨던 것일까?)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병원 복도에 앉아있자니 너무나 막막했다. 무엇보다 내가 아직 어머니를 보내드릴 준비도 되어있지 않거니와 더욱이 절대로 보내드릴 수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예상했듯이 병실에 앉자마자 ‘나는 얼른 이 병원에서 회복하고 집으로 갈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하시며 아직까지 삶에 대한(사실 되돌아보면 자식에 대한) 의지가 강하신 어머니의 모습을 봤기에 더욱이 나는 도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내가 그날 어머니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기 위해 찾았던 모든 병원의 의사선생님마다 조금씩 어머니에 대해 다른 소견을 보여주셨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지나고 보니 사실 똑같은 말이셨던 것 같지만…) 어떤 선생님은 오늘 밤부터 고비가 시작될 것이라 했고, 어떤 선생님은 일주일을 담보 못한다고 했고, 어떤 선생님은 일단 심각한 상태이긴 하나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전혀 예측 안되고 현재 상태는 견디실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해주셨었다. 


어쨌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무슨 이야기를 듣던 간에 우리는 함께 오래도록 함께하자며 병원을 나섰는데 저녁에 이제는 죽음을 준비하자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입원을 듣고 당장 친척 어른분들이 병원으로 오셔서 10명이 넘는 가족들이 모여 어머니에게 어떻게 지금 상황을 말할지 이야기했지만 별반 다른 의견이 나오진 못했고, 결국엔 ‘좀 더 진행되는 상황을 보고 말해드리자’고 결론을 냈었다. 


당장 이 글에 쓰지는 않겠지만 미리 결론을 말하면 이 고민은 결국 의미 없는 고민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당장 다음날부터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갑자기 찾아와서 엄마를 보고 갔고 엄마는 우리에게 묻지는 않았지만 당신의 상태가 어떤지 짐작하셨던  듯하다. 물론 엄마가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정말 ‘죽음’을  대비하신 후 해주신 말들은 좀 더 지나서 들었지만(당신의 장례에는 맑은 국을 대접하고 음식은 맛있는 것으로 아끼지 말아달라고 하셨었다...) 그때 이미 아셨던  듯하다. 


어찌 이 순간에 관하여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 날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면 아마도 말기의 암환자 혹은 말기의 암환자를 두고 있는 가족들은 모두 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날 갑자기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 그리고 갑자기 치료에서 죽음을 준비하게 되는 상황 말이다.  암으로부터 어머니를 살려내기 위해서 정말 서적에 있는 모든 책을 다 읽어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나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 말해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말기 암 환자는 늘 언제 건 호스피스 치료를 시작할 것에 관하여 늘 준비해야 한다.  차차 여러 글을 쓰면서 이에 관하여 기록하겠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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