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께서 한글 창제 후 반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할배 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 펴디 몯할 노미하니라.
내 이랄 어엿비 너겨 새 스믈여듧 짜를 맹가노니..
'어엿비 너겨' 한글을 만드셨다고 한다.
현대의 말로 하면, 우리가 글자를 씀에 있어서 중국과 다르다 보니 백성들이 글자를 몰라 서로 소통을 못함을 내가 가엾게 / 불쌍히 (어엿비) 여겨서' 한글을 만드노라고.
문화창달의 거룩한 의무감으로 만드신 게 아니라, 백성들이 자기 의사를 쉽게 전하지 못하고 세상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한글을 만들게 된 계기라니.
내가 백성들을 보니 너무 속이 상해서 만들었다고 하신다. 그는 천재였고 휴머니스트였다.
세종대왕은 백성을 어엿비 여기셨고 나는 오래도록 나를 어엿비 여겼다.
제3자가 되어 나의 출생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를 통찰해 보면 안타까운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따뜻한 가정 또는 풍족한데 따뜻하지는 않은 가정, 둘 다 아니었고 아무리 엄마, 아빠 역할을 처음 해보는 나의 부모님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많이 보였고 했다.
유혹에 안 흔들린다는 나이를 넘어섰지만, 여전히 나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에 흔들린다.
이제 인간 대 인간으로는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내려놓게 되었지만 자식 대 부모로서는 아직 내려놓지 못했다.
다툰 적이 없기 때문에 애초 화해가 아니다. 나의 일방적 용서와 망각만이 겉으로나마 괜찮은 부모자식 관계를 만들 텐데 이미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다 알아버린지라 용서도 망각도 되지 않는다.
꽤 긴 시간, 내 안에서 그에 대한 투쟁이 있었다.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한 절대 충성과 효도라는 미덕 앞에서 계속 꼬이고 뒤틀리며 화가 나는 나에 대한 스스로의 꾸짖음, 반발이 있었다.
이 정도면 꽤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 30대 후반에 이르러서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 이어졌고, 그래도 견고히 버텨낼 것이라 믿었던, 내가 가장 믿었던 존재 - 내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나의 인생을 반추했다. 그 사이에 부모님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이해가 이루어졌다.
그분들은 너무 젊었고,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식을 보았다. 귀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자식인데 심지어 욕심도 많아 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 반발했다.
그래도 책임감은 평균 이상의 분들이라 최선을 다하셨겠지만 많이 분하고 아까우셨을 것이다. 저렇게 예쁘지도 않은 자식의 삶을 위해 희생되는 당신들의 젊음과 노력과 돈이.
이해한다. 그럴 수 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을 위해 보상 없는 대접을 끝없이 해야 하는 막막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다른 형제들보다 내게 유독 매몰차셨고, 아픈 말을 많이 하셨다. 내가 저항할 수 있기 전까지는 숱하게 맞았다.
내가 잘못해도,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부모님의 폭력은 나를 향했다. 화풀이 대상이었다. 그분들에게 나는 애초 기쁨의 대상일 수 없었다. 부모님에게 한 번도 아이 었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눈치 보고 인정받고 싶어 하며 사랑을 갈구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핍을 지나간 연인들에게 요구했다.
부모가 주지 않는 무한정의 사랑을 그들은 잠깐 동안 주었지만, 얄팍하디 얄팍한 남녀의 사랑에서 불균형한 사랑이 오래 이어질 리가 없는 것.
대부분의 연애가 그들의 달라진 태도에 대한 나의 실망으로 끝났다.
왜 나의 연애는 항상 끝이 이런 식인지에 대한 화 역시 늘 내 안에 있었다. 그에 대한 해답 역시 내가 무너지고 나서야 알았다.
그들이 줄 수 있는 사랑은 내가 그들에게 기대하던 것과 애초에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들이 나빴다기보다 내가 틀렸던 것이다.
마치 채소가게에 가서 꽃등심 주세요 하는 격이었달까.
이 말을 하기까지 많은 내 안의 망설임, 서성거림이 있었다.
내 연애사는 결핍된 사랑에 대한 뻔뻔한 구걸이었다. 그래서 늘 끝이 좋지 못했다.
개인사가 그러한데, 공적인 사회생활이 평탄할 리가 없었다.
나의 결핍은 일하면서도 툭툭 튀어나왔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에 늘 절박하게 안달하며 몰입했다. 그러다 보니 미움도 시샘도 많이 받았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치이고, 연애조차 평탄하지 못한 나를 가엽게 여겼다. 게다가 돈도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막 밥벌이를 해야 하는 시기에 꽤 길게 월급의 반 이상을 집안의 부채를 갚는데 썼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아주 큰돈이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매우 큰 부담이었다.
매월 부채 상환을 위해 송금하고, 휴대폰 요금을 내고, 교통카드를 충전하고 나면 수중에 20 만원이 남았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같은 깡은 없어서, 20만 원으로 종종거리며 사는 내가 너무 가여웠다. 나의 청춘은 가난 그 자체였다.
20만 원으로 생활하던 시기를 끝내고 나서도 나는 왜 그리 내가 가여웠을까. 왜 그다지도 나를 안타까워하며 불쌍히 여겼을까. 스스로를 비참히 여기는 악독한 빈곤감에 취해 있었다.
그리고 왜 몰랐을까. 내가 나를 가엽고 불쌍한 존재로 여기는 게 남의 눈에도 다 보인다는 것을. 함부로 해도 되는 불쌍한 애로 취급된다는 것을.
더글로리의 송혜교 대사처럼, 그들은 얼마나 만만한 그것을 잘 알아보는데.
넘어지고 굴러서 지칠 대로 지쳤을 때도 찾아갈 곳이 있었다면, 나의 인생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대체 왜 이리 고난이 끊이지 않고 마음은 너덜거리기만 하는지, 왜 나는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불운에 그저 내던져지기만 하는지에 대한 그 답답한 절망감의 끝을 내려가 보고서야 알았다.
먼 우주를 돌고 돌았던 내가, 우연히 반갑지 않은 자식으로 태어난 운명의 결과라는 것을.
탓한다고 나아지지 않고, 화낸다고 바뀌지 않을 운명.
아무런 의미 없는 분노로 나를 오랫동안 물어뜯고 있었다. 자해공갈단이 따로 없었다.
의미 없이 스스로를 때리고 짓밟았던 대가는 지금도 갚고 있다. 세속적 성공 기준에 미달하여 일찌감치 낙오한 나를 더 이상 어엿비 여기지 않는다.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
그토록 갈구했던 사랑을 내가 나한테 주는 법을 이제 배워가는 중이다. 그래서 매일 따뜻한 물을 마시고 따뜻한 방에서 나를 재우며 먹고 싶은 반찬 한 가지는 만들어 먹는다. 기왕이면 넉넉하게 배부르게.
안 불쌍하다. 가엽지도 않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비참 해질지를 혼자 경쟁하던 비련과 가련의 여주인공은 폐기처분했다.
캔디까지는 아니어도, 오렌지카라멜 비슷하게 그냥 유쾌하게 살아보려 한다.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제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