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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Jul 27. 2023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어 시작한 영어공부記 2.

ADHD 영어공부법

학창 시절 새로운 학기가 될 때마다 스스로 다짐했던 계획 중 하나는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성격 바꾸기


더 정확히 말하면 아무리 바꾸려 해도 도저히 교정되지 않는 생활 습관이 싫어서 바꾸고 싶었다.


정리정돈 못하고,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동시다발적으로 하는 것, 시작은 즐겁게 하다가 중도에 흐지부지 되어 버리는 것, 아침에 일어나기가 너무나 힘들고 밤이면 정신이 또렷해져서 늘 새벽에 잠드는 것, 남의 말을 잘 못 듣는 것, 찬찬히 생각하고 행하지 않고 급히 하다가 사고 치는 내가 싫었다.


꼼꼼하고, 진지하며, 집중력과 끈기가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지만 늘 실패였다.


그래도 좋아하는 것에는 약간의 오타쿠 기질을 보일 정도로 빠지기도 했는데, 이러다 보니 해야 할 것을 안 한다거나 때로는 정신 나갔나 싶을 정도로 선을 넘으며 스스로를 피폐해지게 만들기도 했고 그런 나의 나쁜 경험 중 하나가 지난 연애들이었다. 정신 못 차리고 빠져들어서 나 자신에 많은 해를 입혔다.


시간이 흘러 흘러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ADHD었다.


누군가 나에게 장점을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아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이런 나를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공부를 결심하고 선택한 나의 공부법은 '무조건 재미있게'였다.


그렇게 간택된 나의 첫 번째 영어교재는 나의 인생 드라마 'SEX AND THE CITY'.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던 이 드라마를 다운로드하여 영상 플레이가 되던 아이리버 MP3에 넣고 밤마다 이어폰으로 들으며 잠을 잤다. 아이리버 MP3이 망가져서 영원히 재생이 되지 않자 영상 재생이 되는 전자사전에 다시 영상을 옮겨 담고 또 매일 들었다. 그렇게 3년간 매일 섹스 앤 더 시티를 들으며 잠을 잤다.


섹스 앤 더 시티 에피소드당 최소 50번은 봤겠다 싶을 정도로, 대사를 외울 정도로 보고 듣다 보니 자막 없이 봐도 내용을 다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들의 대사가 귀에 꽂혀 직독직해가 되는 그것이 아니라 워낙 많이 봤어서 내용을 아는 것이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대본을 다운로드하여서 읽어보았다. 그런데 대본으로 보려니 또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으면 또 바로 박차고 나가는지라, 섹스 앤 더 시티는 듣기만 하는 것으로 자체 협의를 하였다.


다음 공부법을 찾아야 했을 때 불현듯 고등학교 때 가끔씩 사보던 굿모닝팝스가 떠올랐다.


내가 굿모닝팝스를 좋은 영어교재로 인식했던 이유는, 어렸을 때 이모집에 가면 당시 그 집에 기거하던 외삼촌이 보던 오성식의 굿모닝팝스 교재가 있었다. 활자중독인 나는 어릴 적 친척집에 가면 그 집에 있는 책들을 꺼내서 자리피고 앉아 읽곤 했다. 그렇게 보았던 책 중 하나가 굿모닝팝스였고 내게 굿모닝팝스는 실용 영어 교재의 바이블같은 느낌이었다.


바로 굿모닝팝스를 한 권 주문해서 책에 등장하는 모든 표현을 외웠다. 그 시기의 굿모닝팝스는 거의 마지막 장에 일정표 같은 달력이 있었고, 그 달력에는 매일 외워야 하는 중요 표현들이 있었다. 그것을 다 외웠다. 짜릿했다.


외운 표현에 줄을 그어가며 하나씩 해치울 때마다 거의 마음만은 기세등등 관우였다.


그렇게 한 달에 한 권씩, 굿모닝팝스를 너덜거리게 만들며 영어공부를 했다. 영화와 팝송을 다루는 교재이다 보니 재미도 있고, 문제를 풀 필요도 없고 문법을 외워야 하지도 않는 정말 실용 회화와 표현들을 다루는 책이다 보니 질리지 않았다.


굿모닝팝스 외우기는 내 영어공부의 8할이다. 지금도 영어공부에 대한 느슨해진 마음 기강을 다잡을 때면 굿모닝팝스를 사서 외운다. 줄 그어 가며 아주 아날로그 식으로 공부해 나가는데, 공부하며 점점 너덜거리는 굿모닝팝스를 보면 그리 흐뭇할 수가 없다.


집중력은 낮고 충동은 높은 나를 저 멀리 뉴욕의 그녀들이 좌충우돌하는 인생사를 보여주며 영어로 구원해 주었고, KBS는 진정한 수신료의 가치로 내 인생의 항로를 열어 주었다.


내가 한 것은 생각해보면 그저 영어공부를 하겠다는 결심을 매일한 것 뿐이었다.


대단한 일을 한게 아니었다.


모든 것의 기회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은인들이 열어준다는 것을 영어공부로 배웠다.


* 늘 가방 속에 한권 넣고 다니는 굿모닝팝스~ 과월호도 종종 다시 보기하며 마음의 기강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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