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정하 Jul 27. 2023

나의 가스라이팅 보이프렌드

1.  다정했던 사람. 단, 나에게만이 아닌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10년을 만났다.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야 뒤돌아보니 그 10년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지고 마는 나팔꽃보다 짧았다.


별것 아니었다.


처음 만났던 시기, 나는 고용불안정성에 시달리는 사회 초년생이었고 들어가는 회사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처우, 요구사항이 있었다.


교회 출석 증빙 자료로 주보를 제출해야 하거나, 술을 억지로 먹이거나, 써온 보고서를 직접 손으로 찢으라고 한다거나, 월급을 70만 원 주면서 새벽까지 일을 시킨다거나 하는.


대기업 공채와 항공사 시험을 준비했지만, 취업 준비에 드는 돈을 아르바이트 만으로 충당하기 어려워 눈을 낮춰 당장 들어갈 수 있는 회사를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돈이 없었고, 바로 앞날도 어찌 될지 모르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그 시기에 그가 다가왔다. 그는 다정했고, 따뜻했으며 나를 감싸주었다.


내가 배고파하면 밥을 떠먹여 주고, 내가 발이 아프다면 멈춰 서서 발을 주물러 주는 사람이었다.


부모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안락함을 느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안전함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어릴 적에 다쳐 한쪽 다리가 조금 짧았다. 그래서 걷는 것이 나와 달랐다. 그 이유로 군대를 면제받은 사람이었다. 그와의 시작에 있어서 그 부분이 걸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 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내게 매력적이었다. 그 매력이라는 것은 평생을 늘 불안에 떨고 살아온 내게 마음 놓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아주 처음에만 그의 다리가 신경 쓰였을 뿐 10년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그의 장애가 갖는 그 어떤 의미도 내게는 없었다.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없었다. 그냥 똑같은 연인이었다.


극도로 불안정했던 시기를 지나 나는 조금씩 안정되어 갔다. 정규직으로 자리를 잡았고, 조금씩 연봉을 높여가며 미래를 준비했다. 내가 그렸던 그 미래 안에는 그가 있었다.


그 역시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렇지만 돈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그는 그의 집의 실질적 가장이었다. 그럼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데 그는 입시는 물론 대학 다니면서도 돈 드는 예체능 전공을 했고, 그 전공을 살려 직업을 찾으면 본전 회수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저 연봉계의 대표적 직업이었다.


내가 보기에 분명 성실한데, 제대로 돈을 모으지 못하는 그가 안타까워 제안한 것이 해외 취업이었다. 더 나은 커리어와 수입을 위함도 있었지만,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가 답답했다.


해외에 나가 가족과의 거리를 두고 본인에게 집중하게 되면 훨씬 성장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와 함께 하는 삶에 있어서도 더 수월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내 눈에 그의 가족들은 그의 족쇄 같아 보였다.


그와 함께 하는 삶을 의사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그의 가족이었다.


내가 영어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그에게도 학원을 함께 다니자고 제안했고, 새벽반 수업을 들으며 그렇게 영어공부를 해 나갔다.


그리고 그가 먼저 해외 취업에 성공했다.


그와 이미 수년간의 연애를 지속한 상태였지만, 그가 떠나는 것이 그리 슬프지 않았다. 그는 울먹이며 떠났고 나 역시 조금은 슬펐지만 후련함도 컸다.


이제 나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겠다는 기대감 역시도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나는 한국에서 자리를 잡아 멀지 않은 시기에 합쳐서 해외에서 영구 거주하는 것이 목표였다. 나는 열심히 돈을 모으고 그 이전보다 더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다.


해외로 떠난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놀이동산에 간 것 같았다.


답답했을 한국에서의 여러 책임들에서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졌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레 그는 그곳에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한국에서는 그리 술을 가까이하던 사람이 아닌데 위스키 파티에 가기도 하며 정말 미드에 나오는 사람 비슷한 삶이 그에게서 보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이, 맨주먹 하나만 있던 그와 내가 이렇게 사회에서 자리를 만들어가는구나 생각하며 뿌듯함도 종종 느꼈다.


혈혈단신 해외에서 자리 잡아가는 그가 장했다.


그와 내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수시로 연락을 하고 주말이면 영상통화를 하며 맥주를 마셨다. 떨어져 있다는 생각조차도 가끔 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연락이 점점 뜸해졌고 주말이면 늘 어딘가에 갔다. 때로 밤새 연락이 되지 않기도 했다. 이상함을 감지했지만, 워낙 나에게 다정했고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었으며 때로 이렇게까지 나를 다 받아주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기에 해외 나가 들뜬 그 마음이 주체가 안 돼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그가 해외로 떠나고 9개월 후.


갑자기 한국에 온다고 했다. 9개월 만에 만난 그는 여유로워 보였다. 마치 어제 만난 것 같았다. 꽤 긴 시간 떨어져 있음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IT 기술의 발전은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까지 바꿀 수 있는 대단한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나의 작은 투정에도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는 데이트하러 나온 나에게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어떤 이유였는지 기억도 안나는 작은 것으로 차려입고 나온 내게 그냥 집에 가란 말을 하니 황당했다.


9개월 만에 하는 데이트에서 만나자마자 다투기만 하고 나는 집에 들어갔고 왜 벌써 들어오냐는 엄마의 물음에 그냥 급한 일이 생겨 그랬다고 넘어갔다.


그가 휴가를 받아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내내 뭔가 이상했고 불편했다.


일련의 것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그가 이런 말을 갑자기 했다.


'그렇게 오빠가 좋아?'


그와 7년 정도를 만난 시점이었는데 저런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그 순간 명확해졌다. 그가 귀국한 시점부터 계속 나를 불편한 감정이 들게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는 나를 '을'로 대했다.


이상함을 제대로 감지하고 물었다. 꽤나 집요했을 것이다.


결국 그가 털어놓은 것은 '사라'라는 이름의 한국 여자를 만났고 스킨십은 어디까지 갔으며 등등이었다.


같잖았다.

우스웠다.


나와 7년을 함께 해놓고도 고작 그 9개월 새에 칠렐레 팔렐레 정신 나가 헛짓하고 있었다.


정말 꼴값을 떨고 있었다.


그가 지금 있는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성치도 않은 그의 다리에 채워진 현실의 굴레에서 약간이나마 벗어나 수면 밖으로 나아가도록 그를 밀어 올려보려 힘을 보탰던 나를 철저히 기만했다.


차분히 나는 정신 차리고 자리로 돌아오라고 했다. 우리 관계에 지금 장마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자고 했다.


그러겠노라 했지만 난 알고 있었다.


그는 나약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나에게만이 아닌,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작가의 이전글 이렇게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어 시작한 영어공부記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