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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Aug 03. 2023

나의 가스라이팅 보이프렌드 2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돼라.


어릴 적 본 드라마 '미망'의 줄거리는 다 잊었으나 개성 거상, 대부호 집안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과 청상과부로 살던 주인공의 어머니가 하인과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고, 온갖 구박을 받다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가장 똑똑했던 딸에게 유언을 남기는 장면만은 기억이 난다.


부끄러움을 아는 이가 되라는 것, 그것이 어머니의 유언이었다.


무릇 부끄러움이란 뜨거운 것을 만지면 뜨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자연습득되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인가?


자라며, 살며 알게 되었다.


비좁은 누에고치에서 벗어나 제발 한번 날아보라고 그를 밀어 해외로 내보냈던 나의 순수를 폄훼했던 나의 오랜 연인.


그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여 9개월만에 마주한 내게 그곳의 '사라'라는 여자와 무엇을 했고, 어떤 사이인지를 내 채근에 술술 털어놓았다.


'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라며 울부짖던 어떤 드라마의 주인공 모습을 난 이미 수년 전에 라이브로 보았다.


나에게 헤어짐을 고하기 위해 그곳의 '사라'와 약속을 하고 다짐을 건네고 한국에 왔지만 어쩌다 보니 차일피일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아마도 그곳의 사라에게서 온갖 닦달과 재촉을 받았을 그는 내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며 안절부절 못하기만 한 체 결국 관계를 끝내지 못하고 떠났다.

 

아마 한국에 도착하기 전 그와 사라의 시나리오는 나와 만나는 즉시 깔끔하게 헤어짐을 고하면, 한숨을 몰아쉬며 국제전화를 걸었어 이 말을 하는 것이었으리라.


다 정리됐어.

그 말을 하는 순간에 옷은 꼭 휘날리는 트렌치를 입었을 것이고, 전화 너머의 사라는 말없이 눈물을 터뜨리며 드디어 우리 이제 제대로 시작하는거냐며 감격에 겨워하는 것이었을 뭉개진 그들의 시나리오.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가 무너뜨린 나와의 여러 약속들처럼, 사라와의 약속도 늘 하던 대로 했던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돌아간 그는 세상의 모든 고독과 우울과 감성이 충만한 사람처럼 늘 우수에 차 있었다.


한심했지만, 오래된 정에 끊어내지 못하는 내가 더 한심했다.


단,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이 관계 종말은 주체는 나여야 한다.


그는 감히 입에 올려서도 안되는 권리이자 권한이었다.


일단은 있어보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생각이 길어졌다.


계절이 바뀌었고,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다 보니 그가 내뱉고 간 이미 저질러진 짓거리들이 하룻밤의 토사광란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그가 배설처럼 쏟아놓고 간 행위에 대한 이야기는 화두에 오르지 않았다.


습관처럼 이어지는 그가 들어앉은 나의 일상 속에서 매일 생각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안락함이었다.


그는 내게 인생에서 가장 큰 안락함을 주던 사람이었다. 그가 곧 안락함이었다.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긴 장마의 끝이 궁금했다.


어느 순간 비가 조금씩 멎었고, 그의 충동이 몰고 온 장마가 끝나가는 듯했다.


그런 어느 날 말레이시아에 출장을 간다고 했다. 호텔 건축 과정에서의 일부 업무를 대행한다고 했고, 숙소는 어디냐는 말에 출장이기에 출장지 인근의 임시 숙소에 머문다고 했다.


미운 짓을 했지만, 노가다 판에서 구를 그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길, 출장 기간 내에 연락이 잘 닿지 않으리라고 했다. 말레이시아 외딴섬의 어느 곳에 위치해서 통신이 좋지 않다고 했다.


출장의 며칠간 두세 개 정도의 카톡 메시지만이 올뿐이었다.


그가 보내온 메시지 속에는 고즈넉한 동남아 섬의 처연해 보이는 바다, 그곳을 배경으로 남긴 본인의 셀카가 있었다.


내가 사준 옷을 입고 있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 웬일로 하지 않던 국제전화를 걸었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매우 고무된, 텐션이 올라갈 대로 올라간 목소리로 다녀왔다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치 우리 사이에 그간 아무 일도 없던 것 같았다.


그가 보내왔던 사진을 다시 보았다.


수년 만에 보는 바다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 위에 얹혀 있는 안경에 비친, 일렁이는 여자의 형상도 거기 있었다.


그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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