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끈 늘이기 작전
월요일부터 금요일, 아침 9시에 출근하면 퇴근은 언제가 될지 모르는 삶을 십수 년간 하던 중 간간히 이직을 위해 쉬던 시기에는 늘 해외로 떠났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만끽하는 해방감, 이 도시의 전망대에서 지금 당장 몸을 던진다 한들 아무도 나를 찾으러 올 사람이 없다는 고립감이 주는 묘한 짜릿함이 좋아 퇴사하면 바로 짐을 싸고 비행기를 탔었다.
해외에서 실컷 걷고 자고 놀다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울은 시작되고 인천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부터는 강력한 현실 타격감으로 마음이 서늘해진다.
백수 상태로 해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니, 한국 도착하면 실업자로서 새 직장을 찾기 위해 밤낮으로 이력서를 쓰고 돌리며 '구직의 달인' 경지를 시연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이제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자기 문답의 부담감은 입국신고서의 직업을 쓸 때 정점을 찍는다.
일단 퇴사했으니 백수인데, 어쨌든 마케팅 일을 꽤 오래 했고..?
나의 집은 어디인가를 묻는 이방인의 심정이 되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어디인가를 고민하면서도 입국신고서를 비롯한 직업을 적는 공식 문서에는 늘 '마케터'라 적었다. 회사원이라 쓰기에는 어딘가에 종속된 듯하여 자존심이 상했고, 마케팅이라는 일을 너무 사랑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마케팅의 정의였고 현재도 그러하다. 그래서 진심을 다하지 않는 마케터는 유죄다.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 무엇을 하겠다는 조건부 사랑 고백이 아닌, 그저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말과 행동을 뜨거운 눈빛에 얹어 보냄으로써 상대가 더 말하지 않아도 안다며 마음을 열어주는 초코파이 정신이야말로 마케터의 근본이며 사수해야 할 결연한 의지가 아니던가!
초코파이 정신!!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한다!
이거 좋아요, 한번 써보세요 따위란 없다!
초코파이 정신이 바로 나의 마케터관(觀)이었으며 마케팅의 정도 (正道)였다.
나의 순애보, 나의 열정, 나의 갈망, 나의 환희.
그렇게 나는 마케팅을 해 왔는데, 회사를 그만두면 나는 더 이상 마케터가 아니게 되는 것인가?
이 고민은 더 시간을 돌려 서른을 눈앞에 둔 시점으로 간다.
따박따박 나오는 나쁘지 않은 급여, 지하철 타고 출근할 수 있는 집의 위치. 딱히 못 견디게 싫고 어려운 것은 없는 일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살 수 없었고 살기 싫었다.
반짝이는 정도가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광택이 흐르는, 명품의 윤이 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학력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통장에는 대학원 몇 학기 학비 정도는 낼 수 있을 정도의 지난 직장생활의 고생들이 숫자로 쌓여있었다.
그렇게 나의 대학원 생활은 시작되었는데 막상 학교를 다녀보니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학교의 선배 선생님들이 교수님들께 갖는 감정은 존경과 경외를 넘어 종교적 신념이 더해진 추앙에 가까웠다.
'너는 왜 일하느냐?'라는 고용주의 속이 뻔히 보이는 질문에 바로 옆 나이 지긋한 고용주의 기사님이 '저는 회장님 위해 일합니다.'라고 하더라도 '저를 위해 일하죠.'라고 말하던 나였기에 맹목적인 신실함이 놀라웠고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거북했다.
돈 내고 온 교육 서비스의 소비자인데 왜 서비스 공급자에게 존중 이상의 수그림이 필요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학교 세미나가 있는 날 의자에 다리를 꼬고 있느라 다리 한쪽이 의자의 바깥쪽으로 약 5센치 정도 살짝 나와있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사회성과 융통성이 상당히 결여되어 보이는, 남산 딸깍발이가 동여맨 갓끈이 연상되는 커다란 리본을 가슴팍에 야무지게 매신 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교수님 지나가실 길이니 다리를 치우라.
교수님은 아직 교수실에서 나오시지도 않은 상태였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
지나가실 길의 표면 위로 약 20센치 지점, 그곳에 다리를 얹고 있는 불경한 행위라니, 이것은 거의 신성모독에 준하는 발칙한 행위였고 강당에 모인 많은 분들이 나를 돌아보며 유감을 표하셨다.
어찌 감히.. 쯧쯧..
머리로 이해하기 힘든 몇 차례의 작은 일들이 지나가고, 논문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회사의 허락을 어렵사리 받아 일주일에 하루,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듣고 교수님을 알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논문 작성법을 배우는 수업시간에 최대한 질문을 많이 하며 단시간 내 이해하려 고군분투했다.
얼마 후, 원우회 회장님께 연락이 왔다.
수업시간에 질문이 많았다고 하던데, 왜 그리 질문을 많이 했느뇨?
어찌 아셨나이까?
논문작성법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을 많이 하였사옵니다.
어허, 그런 건 알아서 공부해 왔어야지.
교수님 언짢으시게 왜 그리 질문을 했느뇨?
아니, 한 학기에 내는 돈이 얼만데 질문을 하지 못하나이까?
어리석은 것.. 교수님 언짢으시니 다음부터는 질문을 삼가라.
대학원 생활에 대한 미련이 빠르게 소각되고 있었다.
내가 이러려고 대학원에 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다.
물론 대학원에 들어와 좋은 동기를 만나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학생이 되어 책가방 매고 학교 가는 그 신선한 기분은 행복했으며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에 들어 최대 권수로 가득 책을 대출해 오는 것은 나의 최고 오락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다음 학기 등록을 하지 않았고, 자동 제적되었다.
가방끈 늘이기 작전은 일단 보류, 석사 학위 취득은 또 하나의 부채감이 되었다.
결자해지를 하긴 해야 하는데, 때를 못 찾아 그냥 그렇게 밭 갈듯이 일하고 추수하듯 연봉 올리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와중에 어느 날 벼락처럼 우울증이 찾아왔고, 드러누워 계절을 보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늘의 색도, 바람의 온도도 천지차이었고 통장은 비어 가고 있었기에 뭐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회사를 가고 싶지 않아 일단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며 닥치는 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했으나 나잇값에 붙어 다니는 책임이라는 것들이 뒷짐 지고 나와 내 앞에서 강강술래를 하고 있었다.
목도하고 있자니 속이 타고, 해결하자니 엄두가 안나는 책임들의 춤사위 앞에서 결심한 것은, 일단 예전만큼은 아닐지라도 돈은 벌되 다시는 몸과 마음 모두가 부서지지 않는 선까지 나를 지켜내기로 한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마케터로서의 재택대면혼합근무, 연봉은 적게.
부족해진 소득은 퇴근 후 영어 과외를 하며 채워보기로.
두 가지의 일에서 나오는 소득을 다 합쳐도 우울증 이전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작았지만, 일단 짜증 날 때 소리 내서 욕할 수 있고 목마를 때 물도 마실 수 있는 이 엄청난 자유로 모든 것이 다 상쇄되었다.
이거면 되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또 어떻게든 삶은 살아지더라는 것을 이미 우울증으로 배우지 않았는가.
그래, 이 정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눈뜨면 출근이요, 눈감으면 퇴근인 못 견디게 나쁜 일은 별로 없는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할 때 갑자기 허기가 움트듯, 얼굴도 다 잊어버린 먼 기억 저편의 짝사랑남처럼 생각 하나가 날아들었다.
MBA 해볼까..?
그렇게 가방끈 늘이기 작전은 다시 개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