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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Aug 13. 2023

83년생 골든힛트쏭 - 롤러코스터 '습관'

너를 만났다.

그때 우리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10살 무렵부터 밤이면 라디오를 틀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듣고 뽐내기 대회를 기다리던 어린이는 H.O.T에 도저히 열광이 되지 않는, 아무도 안 알아주는 고고한 음악 취향을 견지하는 소녀가 되었다.


FM음악도시를 감성의 근원 삼아 살던 내게 수요예술무대나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아닌 음악 방송에 나오는 가수라 함은 감히 나의 감수성 세계로의 입장은 영원히 불허된, 결이 완전히 다른 이질을 넘어 격조의 차이였다.


연애라기에는 투명하고, 연인이라기에는 어렸으며, 친구라기에는 진지한 너와 나는 '남자친구', '여자친구'였다.

사귄다라는 말은 너무 가볍게 느껴져 네가 내 남자친구가 되기 이전부터, 된 후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사귄다'라는 말은 우리의 대화에 들어온 적이 었었다.


아마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네가 나를 추억하는 시간이 아주 잠시라도 있다면, 사귀던 사이가 아니라 열여덟 살의 여자친구로 기억할 것이라 확신한다. 내가 그렇듯이.


나는 너를 중학교 3학년, 연합고사를 준비하던 학원에서 처음 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샤프를 주어서 건네주는 나에게 고맙다, 어쩧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고 빨개지던 너의 얼굴을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처음 접한 PC통신의 지역 채팅방에서 너를 다시 만났고, 그렇다 할 대화도 아닌 그저 '여기서 보다니 신기하네.' 정도의 인사였지만 고등학교 2학년을 앞둔 겨울방학, 늦은 밤 문제집을 풀다 잠도 깨울 겸 접속한 PC통신에서 너를 다시 만났다. 소개팅한 옆 학교 남학생의 적극적인 고백에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술술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길 했고, 고백남과 같은 학교였던 너는 '네 마음이 아니면 잘 거절하는 것도 예의'라는 말로 쉽게 끊기지 않을, 대화의 연을 만들었다.


그렇게 방학이 끝나갈 때까지 매일 밤, 약속하지 않았어도 접속하면 늘 네가 있었고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내가 너를 왜 좋아하는지 알려줘'라는, 지금 생각하면 '나 너 좋아하냐'의 원조 같은 고백을 내게 했고 우리는 그날부터 서로의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되었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나를 만나러 왔고, 가끔 학원을 가지 않는 날에는 시내의 커피숍에서 만나 대화를 하며 영화도 보았다. 수업이 끝난 시간과 주말에 시내에 나가면 학교의 모든 친구들을 다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그 도시에서 우리는 종종 데이트라 말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그날도 어느 커피숍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중 서로가 무엇을 듣는지 보자며 카세트에 끼워져 있는 테이프를 교환했다.


나는 롤러코스터였고, 너는 임창정이었다.


이게 누구야? 이런 사람들이 있어..?

롤러코스터가 누군지도 전혀 모르는 너에게, 지금은 효리 남편이 된 이상순의 엄청난 기타 실력, 조원선의 나른한 듯 까칠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지누의 무심한 듯 터프한 베이스 연주, 천재적 프로듀싱까지 더해져 이런 엄청난 명반이 우리나라에도 나왔다며 장황한 설명을 했다.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서 '시부야케이가 부럽지 않아!' 등의 지적 허영 가득한 평가를 하며 '왜 지금 롤러코스터를 들어야 하는가?'를 전도했었다.


왜 다시 밴드음악인가에 대해 또다시 일장연설을 하는 나의 말을 경청해 주던 너를 두고 나는 꽤나 의기양양했다.


평소 임창정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유행가는 유치하다며 평가 절하하던 나였기에 너의 카세트에서 나온 임창정 테이프에 적잖이 놀랐지만 다음 주에 만나 다시 교환하기로 하며 그렇게 일주일간 들어본 임창정의 노래는 나쁘지 않았다.


'나의 연인', '러브 어페어'이 2곡이 특히 괜찮아서 여러 번 들었다.


테이프를 바꿔 듣고 있는 동안은 시험기간이었고 서로 예민했다. 정말 별것 아닌 것으로 그만하자는 말이 나왔고 정말 그렇게 우리는 그만 만나게 되었다.


설마 진짜 그만 만나게 되는 것일까 했는데, 정말이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그만 만나.'는 정말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임을 처음 알았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은 그렇지 않았다. 이래서 연애는 직접 하는 것 외에는 배울 방법이 없다.


그렇게 우리는 테이프를 서로에게 돌려주지 못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생이 되었고,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이라면 꼭 거쳐야 하는 전철역에서 가끔 너를 만날까 두리번거리곤 했었지만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너는, 역시 방심하는 순간 나타났다.


밤새워 술을 마시고 엄청난 숙취에 괴로워하며 거의 기어가듯 학교를 가던 날, 5미터 앞에서 멀쑥한 대학생의 모습으로 서있는 너를 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교복차림의 네가 데자뷔처럼 겹쳐 보였고, 이런 흉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전속력을 다해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내가 종종 상상하던 재회는 이런 것이 아니었다.


반대 방향으로 무조건 뛰던 나는 분명히 보았고 느꼈다.


너는 나를 보았다.


그렇게 찌질한 재회를 끝으로 다시는 나의 삶 어디에서도 너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기까지 몇 번의 연애를 했고 뭘 해도 아무것도 안 되는 20대 초반을 거쳐 월급쟁이 세계에 안착했다.


직장생활이 어느 정도 몸에 익은 나른했던 어느 봄의 오후 시간.


그날 왜 그런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외우고 있던 너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여 싸이월드 사람 찾기 메뉴로 찾아보았다.


남의 집 담을 넘어 보듯 은밀하게, 살금살금 너의 공간을 살펴보며 회사에 다니고 있고 연애 중임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사진도 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1촌이 아니라 불가.


좀 더 보다가는 추적 60분 같은 짓을 할 것 같아 미니홈피창을 닫으려던 그때 희미하게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BGM이 뭔지 궁금해 볼륨을 높였다.


롤러코스터의 '습관'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SNJSqP50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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