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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Aug 13. 2023

83년생 골든힛트쏭 -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언젠가 다시 한번 열여섯

세대마다 최고로 꼽는 DJ가 있겠지만 내게는 단연코 신해철이다.


그대에게의 전주를 듣고 가슴이 설레지 않으면 한국인이 아니다.


그가 떠날 때 울려 퍼질 것이라 말했고 실제 그렇게 된 '민물장어의 꿈'.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 마왕의 장송곡으로 기억되겠지만, 내게는 열여섯 소녀가 자뭇 진지하게 노래방에서 열창하던 노래로 남아있다.


나는 소녀를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으로 만나 중학교 3학년때도 같은 반이었고 다른 고등학교를 갔어도 종종 만나며 교류가 있었다.


공부도 잘했고 얼굴도 예뻤던 친구의 별명은 김지호, 김현주였다.


지금도 가끔 텔레비전에 친구의 열여섯 시절 얼굴이 남아있는 여배우들이 나타날 때면 반사적으로 소녀를 떠올린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 우리는 시내의 작은 영화관에서 '친니친니'를 보았다.


숨이 멎게 잘생긴 금성무의 모습에 홀딱 반한 두 소녀는 언젠가 어른이 되면 함께 홍콩 여행을 가자고 약속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주저 없이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선택했다.


시간이 흘러 소녀는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사관생도가 되었고 나는 평범한 여대생이 되었다.


가난했고 연애에 빠져 한심하게 살고 있던 스물두 살 시절, 광화문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여하러 온다는 소녀의 연락이 왔지만 무슨 이유였는지 기억 안 나지만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기껏해야 남자친구와 시시덕거리는 짓이나 하려고 그랬겠지.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십대 시절을 모두 바쳐 좋아했던 한 뮤지션의 결혼 소식이 전해졌고 소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설마 아직도..?

'오빠는 낙엽이야'라는 한마디를 흘리고 결혼하더니 낙엽처럼 사라져 버린 한 시절을 풍미했던,  舊 천재 뮤지션은 한 일 년 전쯤 진정한 창작곡이 단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는 짙은 의혹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의 결혼 소식을 전하는 소녀의 연락 후,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 나는 아스팔트 밑바닥보다도 낮은 위치인 홍보대행사 인턴으로 아주 빈곤하게 살고 있었다.


월급에서 약간을 저축하고 차비와 생활비를 제하면 10만 원 정도가 남는, 사회최저생계선에 가까운 대졸 신입사원이었다.


매일 아침 선배들의 휴지통을 비우고 커피잔을 닦아야 했다.


탕비실은 따로 없었고 두 칸짜리 화장실의 세면대에서 맨손으로 닦아야 했고 사무실의 어떤 자리에라도 걸려오는 전화는 무조건 당겨 받아야겠다.


내가 가난하고, 능력 없고, 그냥 서럽던 그 시기 소녀는 임관했고, 멋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종종 소녀의 사진을 스크랩해서 내 미니홈피에 걸었던 것은 자랑스러워였다.


나의 중학교 짝꿍이 대한민국 장교라니, 이보다 멋있을 수가..!


비록 나는 찌질하지만, 그래도 내 친구는 이렇게 멋지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사회라는 세상에 나가 소녀는 발레리나가 되었고, 나는 그 발레리나의 기사를 스크랩하는 사람이 되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지고 매일 욕이 섞인 핀잔과 지적으로 찌들어가던 시기, 친구가 결혼소식을 알렸다.


그날은 대통령 선거날이었고, 나는 출근을 해야 했다.


유일하게 남은 중학교 친구의 결혼식을 가지 못했고, 제대로 축하해주지 못했다는 마음 부채감은 대통령이 그 선거 이후로 3번 바뀔 때까지 털어내지 못했다.


후에 축의금을 송금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빈곤은 염치도 사라지게 했었다.


자리 잡히면 더 좋은 선물로 해 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언제가 될지 몰랐다.


미니홈피에 올라온 소녀의 웨딩사진이 낯설었다.


내 기억 속의 친구는 세일러문 디자인의 남색 교복이 거의 모델 수준으로 어울리던 예쁜 소녀였는데, 사진 속에서 와인색의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가진 소녀에게서 외출할 수 있으니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그저 먹고살기 힘들었던 나는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막일에 가까운 노동을 하며 찌들어 사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고 내가 더 괜찮아지면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그런 시간은 오지 않았다.


또 한 번의 시간은 흘러 소녀를 다시 만난 곳은 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일하던  회사의 건물 옆 카페였다.


아기 엄마가 된 소녀는 아이들 책을 사러 나왔다고 했고,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았어도 여전히 소녀 같은 상큼함이 있었는데 그냥 일만 하고 살고 있던 나는 피곤과 지침이 젖은 솜처럼 온몸에 붙어있었다.


그제야 너를 볼 때마다 떠오르던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보드랍고 몽글몽글한 분홍 토끼 인형이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소녀는 미국으로 이주를 했고, 우리는 아주 가끔씩 연락을 했다.


생일이 2일 차이인 친구였기에, 내 생일이 가까워지면 반사적으로 친구가 떠올랐다.


2년 전 우울증 진단을 받고 속세를 떠나듯 고립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


자발적인 경우도 있고, 비자발적인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시절 인연들과의 정리정돈을 거쳐서도 네게 가끔이나마 연락을 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꽤 거리가 있는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너의 귀경을 무척이나 기대하는 사람 중 하나는 나일 것이다.


우리는 감수성이 완성되어 가던 십 대의 시기를 같이 보냈고 이십 대와 삼십 대는 먼 곳에서 보냈다.


나는 민물장어의 꿈을 듣거나, 어디선가 흘러나와 우연히 듣게 될 때마다 소녀를 생각하며 아직 남아있는 인생의 여행에서 종종 소녀와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기대한다.

덧붙여, 서른이 되어 처음 떠난 홍콩여행에서 나는 소녀를 생각했다.


출장길의 비행기에서 무심히 영화를 보다가 이제는 이미지가 너무나 달라져버린 금성무의 최신작을 보았을 때는 더욱 강렬하게 떠오르던 열여섯 소녀가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XSNAF6j8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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